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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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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08. 2022

훌쩍






“이거 이름이 뭐야?”


규채는 서림의 물음 대신 그가 가리킨 손가락에 시선을 두고 반응했다.


“구피.”

“구피? 이름이 신기하네.”


서림은 규채 앞의 빈자리에 앉으며 눈을 빛냈다.


점심시간 끝자락. 창밖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교실을 휘감고,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무리를 지어 웃거나 떠들고, 복도에선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정경이었다. 햇살은 눈을 찌를 듯 아프게 부시다가 하늘의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는 가벼이 부서지고 있었다. 반짝이 가루처럼 떨어져서 곳곳에 내려앉자마자 눈처럼 녹아내렸다.


“이거 앞으로 계속 키울 거야?”

“으응.”


규채는 여전히 서림의 손, 의자 모서리를 꼭 잡고 있는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사리손이란 표현이 쏙 들어맞다 싶을 정도로 작은 손이었다.


“어디서 샀어?”

“저기, 백화점에서.”

“백화점? 어디 백화점?”

“뉴코아.”

“아, 거기 역전에 있는 데?”

“…….”


둘의 대화는 주로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서림이 물음을 던지면 규채가 받아서, 서로가 아닌 허공으로 대답을 던졌다. 그러면 서림은 팔을 쭉 뻗어 그 대답을 잡아내고 또 물음을 던지곤 했다. 일종의 놀이 같았다. 승패 없는 게임.


“나 학원 그쪽으로 다니는데. 담엔 나랑 같이 놀자.”


하지만 서림은 요사이 좀 지치는 걸 느꼈다.


“응? 서규채.”

“…….”


뻔히 관심 있는 척 다가오고 말을 걸고 하는 걸 보면, 저도 성의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용을 써도 늘 묵묵부답이거나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규채에게 서림은 서운함이 늘어갔다.


“아아, 규채야아.”


규채는 다시 멍하니 화병 안의 구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서림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는 듯이 흠칫한 규채가 답했다.


“알았어.”

“아싸!”


그 서운함이란, 물빛 그림처럼 얼마든지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이라 가벼웠지만, 어찌할 수 없는 흔적이 남고 마는 것이었다.

늘 쉽게 마르고 싶었지만 마음의 바탕 곳곳이 울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봄과 여름의 비스듬한 가운데, 매양 따듯한 날이었다.          





   



서규채. 규채는 삼 주 전에 전학 온 애였다. 서림은 첫날 규채가 건조한 낯에 조곤조곤한 말투로 인사를 할 때부터 그 애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마음에 들었다.


규채는 꼭 제가 바라던 아이였다. 제 할 일만 하는 데 여념이 없어 다른 데 관심을 두지 않고, 꼭 해야 하는 말만 하고 과묵하며, 남들이 절 두고 뭐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초연함까지. 어찌 보면 서림이 원하는 성격과 성질의 집합체와도 같았다. 서림은 규채의 타고난 듯한 무심함이 좋았다. 적당한 건조함이 좋았다. 곁에 있으면 쾌적할 것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규채는 땀이 잘 나지 않았다. 물어보니, 타고났다고 했다. 피부는 여드름도 자국도 하나 없이 매끈하고 머리카락은 연갈색에 무척 얇고 살랑거렸다. 타고났다고 했다. 서림은 원래도 제게 없는, 남들의 타고난 것들을 곧잘 흠모하고는 했다. 흠모하고 바라보기에, 규채는 그에게 더없이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서림은 규채와 친해지고 싶었다. 당연히. 하지만 규채는 그닥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서림이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규채가 저뿐 아니라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는 덕분이었다. 서림은 제게 끈기 하나만은 대단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대로 서림은 계속해 규채에게 다가갔고, 움직였고, 그의 느슨하고도 견고한 경계를 마음껏 침범했다. 그것은 규채가 느끼기엔 아주 자연스럽고 능수능란해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규채는 서림의 노력을, 그 노력의 정도와 절박함을 알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치, 이게 뭐라고.”


서림은 교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으며, 괜히 죄 없는 구피를 째려보았다.


규채의 관심은 오로지 구피에게만 있었다. 규채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전학 온 다음 날 웬 물이 든 투명한 봉지와 화병을 들고 와서는, 화병에서 꽃을 빼곤 그 안에 봉지의 물을 넣었다. 그게 뭔지 궁금해서 안달이 나 있던 서림은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규채에게 달려갔다. 서림의 자리는 맨 오른쪽 둘째 줄이었다. 규채는 창가에 턱을 괴고 화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서림은 그제야 그 화병 속 물에 든 것이 물살이라는 걸 알았다. 꽃보다도 작고 연약해 보이는, 헤엄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어 보이는, 나른하고 오묘한 프리즘의 빛을 띠고 있는 은색의 물살이들.


규채는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구피만 보았다. 자주 선생님께 혼이 났지만, 그때 잠시만 수업을 듣는 척하고 다시 온 신경은 구피에게만 쏠려 있었다. 뭔가를 끄적이는 것도 같은데 그게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서림은 그걸 뭐라고 물어봐야 좋을지, 아직 좋은 물음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궁금증만 안은 채로 규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상한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서림은 규채를 보고, 규채는 구피를 보고, 구피는 무엇도 보지 않았지만. 그 셋의 자리마다 점을 찍으면 꼭 삼각형이 되었다. 두 변이 다른 한 변에 비해 지나치게 길어서 한 꼭짓점이 너무 뾰족해지는 삼각형. 하지만 이등변삼각형은 아닌, 그냥 삼각형. 꼭 둘의 사이처럼, 이름도 특별함도 없는.


“서규채!”


또. 또 멍때리고 있지. 서림은 배구 연습 짝인 규채에게 공을 던졌다.


“아, 미안.”


얄미워서 냅다 던져 버렸는데도, 규채는 잘도 공을 받아냈다.

뭐야, 운동 신경도 좋아? 서림은 약이 올랐다. 가뜩이나 햇살도 뜨거운데, 머리에 더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너 멍때리기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일등은 껌이겠다.”

“그런 대회가 있어?”


곧바로 대답해준 것은 처음이기에, 서림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세상에 얼마나 많은 대회가 있는데. 그거 서울에, 한강 잔디밭 같은 데서 한대. 재밌겠다. 그지?”

“그러게.”

“헹, 난 참가하면 백 퍼센트 예선 탈락이다. 너 하는 거 구경이나 해야지.”

“진짜 그 대회 가려고?”

“네가 가고 싶으면.”


이렇게 공을 오래 주고받은 건 처음이라, 서림은 좀 얼떨떨했다.


거기다 규채가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는 눈초리에 비해 커다란 눈동자가 저를 향해 있자 어쩐지 쑥스러웠다. 눈도 연갈색이구나. 처음 알았다. 사람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은 연결되어있는 걸까? 같은 색깔이든지 어울리는 색깔로 이루어지도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언제 한강 가자.”


말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서림은 의아했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규채가 언제라도 말을 바꿀까 봐 덥썩 말을 붙잡았다. 그러다 공을 놓쳐버렸다. 또르르 굴러가던 공은 구령대 아래 체육 창고 문에 약하게 부딪혔다. 서림은 얼빠진 채로 있다가, 공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땀이 엄청나게 났다.


데자뷰였다. 그런 일은 한두 번 있던 게 아니었다. 서림은 규채와 있을 때면 자주 무언가를 놓치곤 했다. 손에 들려있던 것이든. 뇌리에 콕 박혀있던 것이든. 힘이 빠져서 그렇다기보단 그냥 이유를 알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최서림. 공을 팔로 치면 당연히 아프지. 어깨 힘 좀 빼고.”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다시 자세를 잡아주고는 반대편으로 갔다.


규채는 공을 한 손에 든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해?”

서림은 규채가 또 멍때리고 있나 싶어 손을 휘저었다. 쟤 혹시 구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에 생각이 이르자 살짝 짜증이 났다.


“서규채!”


규채는 표정 변화 없이 공을 던졌다. 서림은 살짝 힘이 실린 공을 이번엔 가볍게 잘 튕겨냈다. 공은 완만한 궤도로 날아 규채에게로 향했다. 규채는 팔을 뻗어 공을 턱 잡아버렸다.


“뭐야, 잡으면 어떡해?”

“…….”


또 얼마간 규채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것도 데자뷰 같았다. 서림은 그렇게 반듯하게 가만히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규채가 신기하다고 느꼈다. 정반대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는 구피를 좋아하면서.


“야아! 어디 가!”


갑자기 냅다 뛰어가는 규채의 뒤로, 서림은 황당하게 남겨졌다. 땀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선생님 눈을 피해 규채를 뒤따라온 서림은 화장실에 갔다가 교실로 갔다. 역시나. 규채는 제 자리에 있었다. 구피를 보려고 그렇게 수업 중에 느닷없이 달려오다니. 참 대단한 사랑이네. 빈정거리는 생각을 질겅이며 서림은 교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규채가 시선을 들었다. 꼭 소릴 내야만, 뭔가를 던져야만 너는 나를 보는구나. 서림은 문득 구피가 꼭 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도 멈춰 있지 못하고 계속해 움직이는 모습이, 관심을 끌기 위해 열심히 애쓰는 저와 같이 느껴졌다.

우스웠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고작 저 조그만 것 따위가 뭐라고.


“뭐야, 갑자기? 교실은 왜 온 건데.”

“…….”


규채는 묵묵부답으로 책상 칸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고 하얀 약통 같이 생긴 통은 구피의 먹이가 든 것이었다. 서림은 대놓고 조소를 지었다.


“걔네 밥 주려고 그렇게 뛰어왔냐?”


그건 공을 주고받듯 너끈하고 여유롭게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성질이 나서, 땅바닥에 내리꽂히게 던져버린 것이었다.


“아니.”

“그럼?”

“이름이 떠올라서.”

“뭐?”


규채는 속상하다 못해 망연자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서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름,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 뭐라고 지어주면 좋을까.”

“…….”

“근데 아까 갑자기 떠올랐어. 딱 좋은 이름이.”


고작 그런 이유로…. 서림은 황당해서 푸스슥 열이 식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엉뚱함을 가지고 있는 규채의 남다른 면에 그만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서림은 웃음이 잦아든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규채로 인해 웃는지, 서운함을 느끼는지, 짜증이 나는지, 그런 건 절대로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채가 제게 그 모든 걸 기꺼이 알려주기 전까진.


서림은 평소처럼 규채의 자리로 다가갔다.


“뭐가 떠올랐는데? 이름 뭐라고 지을 건데?”


규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명이.”

“공명이?”

“응. ‘공명’이란 단어가 좋아서.”

“…….”

“어때?”

“뭐가?”

“네가 보기엔 어떠냐고.”


제게 의견을 물어봐 준 것도 처음이었다. 서림은 또 얼떨떨했다. 왜 규채가 하는 언행 하나하나에 이렇게 노심초사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할까.


“조, 좋은 것 같은데? 흔하지 않고, 어감도 좋고, 특별하고….”


그런 미소, 규채의 미소도, 제게는 처음이었다.


서림은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머리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깊숙한 혹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중 어딘가에. 달뜨고 저릿하고 눈가가 시큰하고 손에 땀이 나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알싸한 향이 코끝에 어른거리는 느낌이 들고, 동시에 멍했다. 공허한 것 같기도 하고, 꽉 찬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그마저도 특별하면서, 무척이나 이상했다.


“사실 얘네, 전에 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준 거야.”


규채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서림은 왠지 앉을 수가 없단 생각에 그의 언저리에 서 있었다.


“걔가 뭘 키우는 걸 좋아하거든. 강아지, 고양이도 키우고, 무슨 노란색 뱀도 키우고, 풍당벌레도 키우고, 햄스터도 키우고…. 아, 식물은 잘 안 키운대. 그건 아빠가 좋아한다고.”

“…….”

“내가 전학 가서 심심하다니까 나 보고 선물이라고 줬어. 그래서 애지중지 하는 거야. 나는 뭘 키워본 적이 없거든.”


서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늘 근사하고 적당한 것, 알맞은 것만 찾아서 꺼내고는 했다. 한데 지금은 그런 게 다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게 느껴졌다.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고, 햇볕은 한여름처럼 쨍쨍해서 그림자의 경계를 뚜렷하게 만드는, 고즈넉함이 감도는 낯선 교실의 오후였다.


“나, 나도 그래. 아무것도 안 키워봤어.”

“진짜? 강아지나 고양이도?”

“응. 엄마가 털 알러지가 있다고 못 키우게 했어.”

“그럼, 키워보고는 싶었어?”


서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나는 못 키울 것 같아. 게을러서.”


그런 식의 솔직함은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것도 키워보지 않았다는 건 왠지 제 또래답지 않은 것 혹은 정답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다. 길가를 지나다 고양이를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도 좋아하는 척해야 했다. 애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척해야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애들과 잘 지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규채가 온 뒤론, 더는 제 곁에 아무도 없었다. 규채 말고는 아무에게도 그런 노력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저를 감추고 꾸미고 연기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관계란, 그렇게나 휘발성이 강하고 가볍고 얄팍한 것이었다. 서림은 문득 제가 규채를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자신을 위해 애써온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애들 이름 다 지어준 거야 이제?”

“아니, 아직 하나는 못 지었어.”


서림은 규채의 뒤로 걸어가 구피가 노닐고 있는 화병에 다가갔다. 금방 물을 갈아주었는지 잔여물 하나 없이 맑은 물에서 구피 네 마리가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다 생김새가 달랐다. 색깔도, 크기도. 그러고 보면 이렇게 자세히 바라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까.


서림은 떨림을 감추고 물었다.


“그럼 하나는 내가 지어줘도 돼?”


규채는 몸을 옆으로 돌려 앉아선 음,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체하다 너그러이 말했다.


“그래. 근사한 걸로 지어줘.”


“근사한 거?” 서림이 앞자리로 돌아와 앉아 되물었다.


“그럼. 한 번 지으면 계속 그걸로 불러야 하는데. 근사하게 지어줘야지.”

“알았어. 그럼 어떤 애 이름을 지어줘야 되는 건데?”


규채가 맨 위, 수면 가까이 있는 하늘색 빛이 많이 도는 구피를 가리켰다.


서림은 규채를 따라하듯 으음, 소리를 내고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근사한 이름이라니. 뭐가 있을까. 이름이라고 떠오르는 것이라곤 해피나 써니, 그런 강아지에게나 어울릴 법한 흔한 것밖에는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다 떠오른 하나가 있었다. 수면 위를 오가다 가라앉아버린 이름. 서림은 문득 차오르는 쓸쓸함에 미어지는 가슴을 쉬게 내버려 둔 채로 넌지시 말했다.


“서령이, 어때?”

“서령이? 그래.”


규채가 그대로 받아 들여줘서 서림은 고마웠다. 남몰래 지어주기만 하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그제야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이름이 생겨야만 선명해지기도 하지만, 그제야 실체를 깨닫고 흐릿해지도록 이내 가벼워지도록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종이 칠 때까지, 둘은 태평하고 평평한 침묵을 공유하며 쉬고 있었다. 어느새 햇살은 가지치기를 한 양 기세가 꺾여 있었다. 문득 그날 규채가 가져온 화병 속 꽃의 향기가 어른거렸다. 새하얀 리시안셔스, 신기한 이름이지만 향기는 익히 잘 아는 풋내 어린 향이었다.


서림은 묵묵히 햇살과 그림자의 경계 속에 있다가 점점 그늘에 들어왔다. 창살에 그림처럼 싸인 네모난 하늘과 화병 속 물살이를 번갈아보다가 졸음이 와서 눈을 감았다. 졸음이 온 건, 눈이 부셔서도 침묵이 버거워서도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가벼워서였다.          








하필, 전학을 가기 일주일 전 교통사고가 났다. 규채는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윤산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절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담임 선생님은 어디 아픈 데가 있냐면서 조퇴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규채는 마음이 아픈 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그냥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그렇게 땡볕 아래 교문을 나설 수 있었다.


윤산이 입원한 병원은 역전에서 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은 더 가야 되는 거리에 있었다. 꽤나 멀었다. 학교에서 역전까지도 거리가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규채는 반드시 가고야 말겠다고 혼자만의 결연한 다짐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중간에 내릴 곳을 놓쳐서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탔다. 가슴이 답답하고 옷이 버거운 느낌이 드는 걸 보니 하복을 입을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곧 전학을 가면 다신 익숙한 그 하늘색 하복을 입지 못할 터였다. 하늘색과 회색.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이제는 소중한. 규채는 다신 하복을 입지 못한다는 생각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곧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규채는 버스 손잡이를 굳세게 잡으며 우뚝 섰다.


윤산이 있는 병실에 오기까지, 쿵쾅대는 심장과 온몸의 긴장감을 감수하는 것부터 윤산에 대해 묻는 일까지 죄 힘이 들었지만, 그 모든 건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워있는 윤산을 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규채는 윤산을 보자마자 덥석 껴안고 그렇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건 둘을 에워싼 허공에 던져진, 절박한 외침 같았다. 주변은 텔레비전과 의미 없는 수다로 이루어진 소음과 분주한 손발짓과 표정으로 가득했는데도 말이었다.


“나도.”


잠들어있던 윤산은 놀라지도 않고 규채의 등을 토닥이며 답했다.


그때 보았던, 희미하지도 힘없지도 않았던 윤산의 미소를, 규채는 자주 떠올리곤 했다. 그 미소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외딴곳에서 다시 제 세계의 바탕을 정초해야만 한다는 데 버거움과 고독을 느끼는 규채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 미소는 크고 너른 바람과 같았다. 언제든 떠올리면 저를 감싸주었으니까.


“아, 배고파. 얼른 급식실 가자.”

“그래.”


지금 제 곁에는 다른 아이가 있었다. 제게 구피를 선물로 준 윤산이 아니라, 다른 웃음과 이름을 선물로 준 서림이.


규채는 다시 웃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운 것처럼 웃고 답했다. 비록 여전히 물음보다는 대답이 더 편하고 익숙한 편이었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맑은 햇빛이 정수리에 내리쬐고 있었다. 새로운 꽃을 피우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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