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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완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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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04. 2022

혜성의 순간

2017





나는 혼자 깊이 생각에 빠지거나 글을 끄적이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렇다고 만날 책상에 붙어 앉아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런 내 의외의 모습에 다들 중2병이라거나, 하는 짓이 나이랑 이름에 걸맞지 않다고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싫은데 그걸 내게 말하는 건 더 싫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했지만.

사람은 편견 없이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다. 나 또한 그렇다. 애니를 보고서야 내가 아주 편견과 자의식에 사로잡힌 애였다는 걸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누굴 제대로 볼 줄도, 간직할 줄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다는 것도.











혜성이

지구를 지나는

순간처럼    












                

분리수거일인 수요일의 저녁, 집에서 나오는데 아파트 현관에서 서성이는 그 애를 처음 보았다. 세상 밖에 처음 나오는 어린 아이처럼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은 발걸음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잠시 멈춰서니 나를 슬쩍 보곤 말을 걸어왔다.


“저기….”

“네?”

“혹시 몇 살?”


보자마자 대뜸 나이를 묻는 게 조금 언짢았지만 도움이 필요한 듯 초조한 얼굴이라 친절히 답해주었다.


“열 넷인데.”

“나보다 동생이야. 다행이다.”

“아, 예….”

“슈, 슈퍼 가야 되는데…. 어떻게 가는 지 몰라.”

“슈퍼요?”

“도와줘….”


이제 보니 퍽 어눌한 말투에 옷매무새도 허름하고 촌스러웠다. 하기야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지 얼마 안 됐나 보네. 그렇게 생각했다.


알겠다고 하고는 쓰레기를 버렸다. 그리곤 쉽게 아파트 정문을 지나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그 애는 날 졸졸 따라 다녔다. 나를 놓치면 길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지 내게 팔짱을 꼈다. 팔을 꽉 잡는 손이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처음 보는 애한테 나이를 묻질 않나, 내가 동생이라고 말을 놓지 않나, 스리슬쩍 팔짱까지 끼다니. 어쨌든 슈퍼로 들어갔다. 데려다줬으니 돌아가는 길도 도와줘야 된다는 생각에 별말 없이 옆에 붙어 있었다. 포스트잇 쪽지를 붙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기에 슬쩍 엿보았다. 장봐올 것들을 써놓은 것이었다.


“줘봐,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아이스크림 먹자.”


대파, 참기름, 부침용 두부, 계란, 어묵. 잽싼 걸음으로 척척 장바구니에 담아 넣는 날 보던 그 애는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안 사줘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나는 바닐라, 저는 딸기맛. 나도 딸기맛이 좋은데. 그 말을 삼키고 비닐 봉지를 들어줬다. 이왕 도와주는 거 끝까지 도와줄 요량으로. 보니까 못 먹고 자라기라도 했는지 비쩍 말라서 안 돼 보였다.


“어디 살아?”

“아까… 그… 108동 408호!”

“우리 옆집인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아아, 나는 잠,잠깐 전으로 왔어.”


온 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인 듯했다. 원래 계단으로 다니지만 기력이 없어 보이는 생김새를 보니 절로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이 갔다. 집 앞에 비닐봉지를 두고서 인사를 했다.


“안녕.”

“안녕, 또 봐-”


그렇게 말하면서 해맑게 웃는 얼굴은 꼭 애기 같았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의 소꿉친구처럼…. 그 스치는 잔상에 정이 드는 느낌이었다.


“엄마, 옆집 이사 왔어?”


집에 돌아와 밥을 짓고 있는 엄마에게 가서 물었다.


“아니, 옆집 사람 이사 온 지 일 년도 더 됐는데.”

“응? 옆집에 사는 애 만나고 들어오는 길인데. 나보다 자기가 언니래.”

“그래? 어머, 애가 있었구나. 일이 바빠서 안 보이는지 이삿날 말고는 마주친 적이 없어서 몰랐네. 몇 살이래니?”

“몰라. 하여튼 자기가 언니래. 근데 말투가 딴 나라에서 온 애였어.”

“그래? …아무튼 친하게 지내라. 잘 해주고.”


그 여름날, 불현듯 마주친 모습은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듯했다. 새로 만난 친구에 들뜬 유치원 어린 애도 아닌데 이상했다. 뒤척이다 빠진 잠결에 본, 천장에 붙은 야광별이 반짝이는 잔상이 꿈에 아른거렸다.






학교도 학원도 가지 않는 중학생의 방학은 참 여유롭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남다른 건진 몰라도 게임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할 일이 없었다. 집에만 붙어있으려니 답답해서 밖을 나섰다.


“안녕!”


문을 나서자마자 그런 날 기다렸다는 듯 반기며 인사했다.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니 다리가 저린지 아야야- 하며 휘청이기에 팔을 잡아 주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너. 기다렸어. 심심해.”

“나?”

“아파? 너무 얼굴 안 보였어.”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이틀 집에만 있었는데 그 이후에 날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표정을 지으니 그 애는 해사한 얼굴로 맞아 주었다. 그제야 기본적으로 물어볼 게 생각났다.


“이름이 뭐야?”

“내 이름… 宋…….”

“뭐라구?”

“애니. 中國에서 왔어. 우리 파파랑 엄마는 애니라고 불러.”

“애니….”

“너는?”

“난 혜성이야. 김혜성”

“해성… 해…써엉… 해썽이, 안녕, 히히.”


둥글게 날 부르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마침 심심하니 동네나 걸을 참이라 같이 걷자고 했다. 애니는 좋다며 활짝 웃으며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걸으면서 애니는 쫑알쫑알 얘기를 해댔다. 다른 애였으면 시끄럽다고 할 법한데 이상하게 나는 그 말소리가 듣기 좋았다.


“학교 안 가?”

“방학이야.”

“오와, 나도 방학이야. 한국도 방학이야.”

“중국에서 왔다며, 거기 학교 다니다 왔어?”

“으응… 나도 방학이라 엄마 보러 왔어.”

“아아.”


그 말은 잠시 머물러 왔을 뿐이라는 걸 뜻했다. 새학 기에 사귄 친구가 금방 전학 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내색하지 않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애니. 아빠는?”

“아빠…는 中國에 있어. Beijing.”

“베이징… 들어봤는데. 거기 수도지? 좋은 데야?”

“응, 아주 좋아. 오면 혜성이도 좋아할 거야.”


내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중국. 많이 듣긴 했지만 한 번도 가본 적도 갈 일도 없는 나라니까. 그런데 살랑살랑 팔을 흔드는 애니를 보니 마음이 들뜨곤 했다. 같이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동네를 걷다 다니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여기가 내가 다니던 학교야.”

“우와아! 학교 예쁘다- 멋있다!”


놀이터를 노니며 펄쩍펄쩍 뛰고 좋아하는 게 딱 초등학생이었다. 삐쩍 마르고 나보다 키가 작은 데다가 작은 것 하나에도 해사하게 웃는 모양이 참 귀여웠다.


“애니.”

“응?”

“엄마 보러 한국 와서 좋아?”

“그럼. 너무 너무 좋아.”

“뭐가 그렇게 좋은데?”

“엄마 만나서 좋구우- 혜성이 만나서 좋구- 히히.”


날 본지 얼마나 됐다고 엄마에 뒤이어 꼽아주는 건지 싶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같이 그네를 타고 놀았다. 주로 하던 신발 던지기를 알려주니 재밌다며, 신발을 던지고 주워오고 다시 던지기를 반복했다. 별 걸 다 좋아하는 구나 싶었다. 중국에도 학교에 놀이터가 있을 텐데….


학교 앞 분식집에 데려가 떡볶이를 사줬다. 중국에서도 먹어봤지만 한국에서 먹으니 더 맛있다며 좋아했다. 떡볶이 하나에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모양을 보니 용돈을 쓴 게 아깝지 않았다. 돈을 더 갖고 나와서 순대랑 튀김도 사줄 걸 아쉬웠다.


밖에서 달리 할 게 없어 우리 집에서 놀자고 했다. 애니는 전보다 더 기뻐하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서 방방 뛰어 대었다. 우리집에 가도 사실 별로 할 게 없는데 너무 기대하면 어쩌나 싶은데도 세상 다 가진 듯 좋아하니 쑥스러웠다.


그렇게 손잡고 나란히 계단을 올라가니 표독스런 얼굴로 애니를 부르는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 라고 부르며 다가가는 애니를 그 엄마라는 사람은 너무나 차가운 얼굴로 맞이하고 있었다.


“엄마아-!!”

“너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나 혜성이랑 놀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그럼 말을 하고 갔어야지!”

“펴…편지 쓰고 갔는데….”


애니는 주눅이 들어 곧 울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얼른 집에 들어가.”

“네에….”


엄마를 뒤따라 들어가면서, 애니는 뒤를 돌아보고 내게 손짓을 해주었다. 그렇게 무섭게 혼을 나고도 날 돌아본 얼굴에는 해사한 미소가 있었다. 그 미소는 그네를 타며 보다가 눈을 찌푸리게 되던 햇살 같았다. 그 눈부심에 오랜 잔상이 남는.


집에 들어가고도 혼이 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다 들릴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가는지 점차 줄어들긴 했지만 끝이 난 게 아닌 듯 보여 걱정이 되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가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오는 길에 열려있던 베란다 창문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집에만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아!”

“너무 심심해서… 엄마….”

“너 때문에 기껏 일찍 들어왔더니, 어휴!”

“죄송해요오….”

“내가 너 한국에 한 번 오고 싶다는 걸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와가지고 왜 신경을 쓰고 피곤하게 만드니?”

“…….”

“네 아빠가 얘기 안 해주디, 엄마 곧 살림 차려. 다른 아저씨랑 결혼해.”

“엄마아….”

“다시는 엄마 보고 싶다고 떼 쓰고 그러면 안 돼. 다 컸잖아, 애니. 옛날이면 시집도 가는 나이야. 꾹 참을 줄 알아야 돼.”

“…네에….”

“배고프지? 밥이나 먹자.”


그 말을 끝으로 두 모녀의 대화는 한참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거세게 뛰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멍청히 서서 그 대화의 여운을 되새겼다.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엄마는 딸을 끌고 가던 손길처럼 말투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딸에게 일말의 정도 주지 않는 모습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나 행복해하는 표정 뒤엔 아직 어린 나이로는 감내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그리운 엄마를 보러 혼자 비행길에 오르고, 일방적으로 찾아와 귀여운 딸 노릇을 하는 아이는……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저녁을 먹을 즈음 베란다 너머에서는 티비 소리만 들려왔다. 일반적인 가정집의 소리였으나 나한테는 퍽 삭막하게 들려와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옆집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누르며 애니를 불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엄마의 애니가 잔다는 에둘러 짓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애니는 정말 잠들기는 이른 이 시각 잠이 들었을까, 아니면 다른 침묵을 지어야 했던 걸까.






그 날 이후로 애니가 보이질 않았다. 새벽녘에 떠나기라도 했는지 인기척도 들리지가 않았다. 심심하다며 날 기다렸다던 애니처럼 나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무작정 기약도 없이 기다려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기다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만화책을 보고 있으려니 시간은 금방 갔다. 애니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날 기다리는 게 얼마나 지루했을까.


그런데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니라 엄마를 기다리던 게 아니었을까. 서운할 건 아닌데 그냥 좀 슬프단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가도 애니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나가 전원이 꺼지고, 퇴근한 엄마가 집에 오실 때까지도 애니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엄마의 닦달로 집에 들어와야 했다. 옆집 애를 기다리느라 종일 앉아있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쑥스러웠다.


열대야를 핑계로 베란다에 나왔지만 잠긴 창문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은은한 불빛이 보였지만 애니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냥 베란다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함을 핑계 삼았다. 어차피 잠 못 드는 열대야, 약한 바람으로라도 달래고 싶었다.


베란다에서 깜빡 잠들었다. 자다 말고 화장실을 가던 아빠가 날 발견하고 흔들어 깨워서 잠이 깨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난간에 몸을 기대는데, 맑은 미성이 귓가에 들렸다.          


功課完畢要回家   수업이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자

老師朋友再會吧   선생님, 친구들, 또 만나요

明天再會明天會   내일 다시 만나. 내일 만나

大家明天早早來   모두 내일 일찍 와

再見 再見           안녕! 안녕!     


중국 노래를 고운 미성으로 부르는 이는 분명 애니였다. 인기척을 내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그렇게 맑고 아름다운 노래는 처음 들었다. 청아한 노래가 새벽의 시원한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퍼졌다. 나만 듣고 싶은 노래라 사소한 아쉬움이 들었다.


한없이 듣고만 있고 싶은 노래가 끝나자 너무 아쉬웠다. 숨죽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재촉하는 말을 뱉었다.


“더. 더 불러줘.”

“…혜성? 혜성이야?”


놀란 목소리로 묻는 말도 꼭 노랫말 같았다. 목소리만 들려주던 애니가 난간으로 나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통통한 볼살에 초승달처럼 휘어진 작은 눈이 귀여운 얼굴, 무척 보고 싶었던 얼굴.


“왜 안 보였어?”

“나?”

“응.”

“나 기다렸어?”

“응. 기다렸어. 안 보이길래.”

“…….”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서글픈 낯이었다. 항상 봄 햇살처럼 해사한 얼굴이었는데.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하고 날 보며 방방 뛰던 모습이 좋았는데.


“보고 싶다고…”

“으응?”

“기다리는 건 바보야….”


날 보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한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슬픈 낯이 곧 눈물로 얼룩질 듯 아슬아슬해 보여, 손을 뻗어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왜 그런 맘이 드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난간 사이는 퍽 멀어서 손을 뻗어도 닿질 않았다.


“우리 친구야?”

“응? 친구?”

“으응.”

“애니가 내 친구면 나는 너무 좋지.”

“…다시 못 볼 수 있는데도 친구 할 거야?”


우리 사이는 이 베란다 난간 사이보다 더 멀 텐데. 아파트 벽이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두는 건 어떤 심경일지 아직 알지 못하는 데도 난 그 일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와 벌써부터 슬펐다.


“그럼.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래.”

“정말? 누가?”

“다들 그렇게 말해.”

“모두가? 그럼 진짜가 아니잖아….”

“아니야. 나는 진짜야. 애니랑 영원히 친구할게.”


영원하다는 말의 의미도 깨닫지 못할 나이면서, 그 때의 나는 감히 영원을 입에 올렸다. 진정한 친구가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친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닿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을 했다.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약속을.


그 순간을 아쉬워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손길을 맞닿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그 미적지근했던 여름날 이후로 다시는 애니를 볼 수 없었다.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얼굴이 그리웠으나 점점 흐릿한 잔상이 되어갔다. 왜 나는 도통 꿈을 꾸지 않는지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현실에서도 나는 꿈이 없는데, 잠들어서도 꿈이 없다니. 참 삭막하구나…. 혼자 있을 때면 그런 감성적인 생각만 하는데 말이다.


다시는 맑고 고운 노랫소리와 해사한 얼굴을 볼 수 없다니. 사진이라도 찍을 걸 왜 집에 아빠가 산 카메라가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안 했는지, 중국 베이징 어디에 사는지 주소를 물어볼 생각도 왜 못 떠올렸는지…. 애니와 나는 이렇게 다시는 마주칠 수 없는 걸까. 나는 무척 후회했고, 그리웠다. 애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오늘밤에 어떤 혜성이 몇 십 년 만에 지구를 지나간다고 했다. 고작 몇 분만 지나간다는 소식에도 사람들은 열광했다. 소원을 빌겠다고, 두 눈에 빛이 지나는 광경을 담겠다고. 나는 아무 감흥도 없었다. 짧은 순간만 지나가는 그 혜성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나 찰나로도 내게 감흥을 주었던 건 애니가 유일했다. 어쩌면 내게 애니의 존재가, 하늘을 보며 눈을 빛내는 사람들에게 혜성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스쳐 지나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건, 생각이 깊지만 그 깊이를 담기엔 얕고 약한 나에겐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스쳐 지나간 순간이 너무 빛나서 눈이 멀었는지 모든 게 꿈결처럼 흐릿해졌다.               


우리의 만남은 한여름의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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