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미완 1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Jun 23. 2022

나뭇잎

자전소설








졸린 눈 비비며 집에서 나올 적부터 따스한 햇살이 정수리부터 온몸에 내려와 감쌌다. 어느 오월의 모서리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아침 공기는 나른했다.


나는 연신 하품을 하며 버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버스에 오르는 우림이를 보았다.


우림이는 또래들 중에서도 유난히 키가 컸다. 그래서 들쑥날쑥하고도 고만고만한 정수리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애였다. 우림이는 앞쪽에 서 있다가 버스가 신호대기 중에 정차하자 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등진 방향으로 ㄴ자로 굽힌 팔로 손잡이를 잡고 섰다.


나는 그 애가 잡은 손잡이와 그 애의 고슬고슬한 정수리가 닿는 모습을 보았다. 우림이는 말을 걸면 뒤를 돌아보고 나를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어쩌면 우림이도 날 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구태여 하는 짓에 더 서름한 기분만 서로 들까봐서.


우림이와 나는 학교에서 같은 반이었고, 같이 다니는 무리에 속해있었다. 그 나이대 또래들은 누구나 자기의 무리가 정해져 있는 듯이 굴었다. 그게 유일한 삶의 방식인 듯이, 생존의 방식인 듯이. 같이 급식을 먹으러 갈, 쉬는 시간에 같이 매점에 가거나 수다를 떨, 시험 끝나는 날이면 같이 시내에 가서 놀, 친구들. 그 무리가 정해져 있지 않은 애들은 어디에서든 겉도는 분위기를 풍겼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그런’ 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기 초, 어떻게든 무리에 들려 애썼고 그러다 은목이의 눈에 들어 지금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


우리 무리의 분위기와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건 은목이었다. 무리에서 누구를 빼고 더하고 하는 것도 그 애의 소관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계속 그 무리에 껴있어야만 했고, 껴있고 싶었다. 그래서 애들이 아무리 날 놀리고 짓궂은 장난을 쳐도 즐거워하는 척했다. 물론 같이 노는 것은 즐거웠지만 때로는 애들의 놀림이 어느 정도를 넘어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다소 힘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너무 사소하고 너무 당연해서. 나에게는 가볍지 않지만 애들에게는 그저 가벼운 순간의 금세 잊힐 장난일 뿐이라서.


우림이는 은목이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고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은목이의 무리에 들어왔다.


나는 처음엔 우림이와 친해지고 싶었다. 우림이는 키도 크고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고, 같은 무리나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금방 친해지고 어울리는 아이였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유의 그런 아이. 하지만 우림이는 어쩐지 날 놀리지도 않았고, 내게 장난을 걸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고 노는 방식은 놀림을 당하면 적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 그게 다였다. 그게 아닌 다른 방식은 잘 알지 못했다.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지금은 벌써 오월. 두 달이 지났지만 우림이와 나는 같은 무리긴 해도 단둘이 있으면 어색하기만 한,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나는 그날도 창가에 앉아서, 그 애에게 말을 걸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 결국은 그만두었다. 무릎에 올려둔 채 손가락으로 읽던 부분을 표시하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창밖에서 개나리색 햇살이 들어와 빼곡한 글씨가 든 책장과 내 까무잡잡한 손등을 물들였다.


우리는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 도선공원으로 갔다. 우리, 라고 하기엔 우리는 나란히 걷지도 말을 주고받지도 않았지만 말이었다.


공원 정류장에 내려서야 우림이가 먼저 내려서 걸어가고 있던 나를 따라와서 말을 걸었다.


“오늘 대따 덥지 않아? 나 좀 봐. 땀 엄청 났어.”


우림이는 교복 목깃을 젖히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게. 오늘 덥네.”


나는 오늘이 너무 덥지 않은 딱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지만, 우림이에게 동조하듯 더운 척을 하며 걸어갔다.


우리의 주위로 제각기 다른 색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지나갔다. 아마 우리 둘도 그 아이들 속에 분간할 수 없도록 섞인 채, 개성 없이 함께 움직이는 모양새로 보일 터였다.


그날은 XX시전학원연합회장배 사생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앞서 걸어가는 애들 중에는 어깨에 동그랗고 까만 화구통을 매고 가는 애도 있었고, 네모나고 커다란 화구박스를 들고 가는 애도 있었다. 우림이는 그 애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학원 다니는 애들인가 봐.” 나는 값나가 보이는 화구박스를 들고 멋진 디자인과 배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 몇몇을 힐끔거리며 부러움이 들었다. 가방에 든 스케치북이 많이 구겨졌을까, 물감통이 고정되지 않고 쏟아졌을까, 생각하며 가방끈을 조였다.


9시까지 공원 한가운데 있는 광장에서 미술 선생님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공원이 워낙 넓어서 우리는 광장을 찾느라 조금 길을 헤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동안 나가본 어느 대회보다도 규모가 큰 대회에 나왔다는 사실에 조금씩 긴장이 커질수록 더욱 말수가 줄었다.


미술 선생님은 참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계셨다. 선생님 주변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동그랗게 모여 서 있었다. 우리는 익숙한 교복을 발견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갔다. 평소엔 조금 엄한 분이었지만 그날은 우리에게 조금 늦은 걸로도 뭐라 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편영이, 석제, 우림이, 그래, 선생님이 다 기대하고 있어. 응? 아마 우리 학교가 상을 제일 많이 받을 것 같아. 선생님은 정말 기대가 돼.”


선생님은 학년에서 가장 잘 그리는 아이들은 이름까지 불러주며 기대를 표하셨다. 나는 제일 먼저 이름이 불린 것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우림이는 날 건조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같은 무리의 친구들이 내가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을 때처럼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림이와 나는 그림에 대해서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 학년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이 미술 선생님의 추천으로 오늘 대회에 나오는데, 2학년에서 가장 잘 그리는 학생은 우리 둘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하는 표어 그리기 대회나 미술 수행평가 때마다 누가 더 칭찬과 좋은 점수를 받는지, 누가 더 잘 그리는지 의식하고 신경 썼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그러지 않는 척했지만. 나는 그 의식을 어느 정도 즐기기도 했다. 내가 상을 받거나 미술시간 때 선생님께 칭찬을 들으면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하거나 나를 띄워줬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림이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아까 내 이름이 불릴 때 우림이가 나를 쳐다본 것도, 나와 같은 이유일 터였다.


“자, 그럼 다들 원하는 자리로 가서 자유롭게 그리는 거야. 몇 시까지라고 했지? 그래, 4시. 도시락은 점심시간에 먹으면 되고, 안 싸온 학생들은 공원 나가서 근처에서 사 먹어도 돼. 얘들아! 시간 꼭 지켜서 지출해야 된다.”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에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어디서, 어떤 풍경을 그려야 좋을까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거닐었다. 주제가 너무 막연하게 느껴졌다. 풍경. 이 커다란 공원 어디든 앉아서 그리면 된다고 하는데, 대체 뭘 그려야 할지, 뭘 그려야 좋은 점수를 받고 상을 탈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조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너 돗자리 가져왔어?”


우림이 뒤에서 물었다. 나는 그 애가 언제 날 따라왔는지 몰랐다. 조금 놀랐지만 평소처럼 대꾸했다.


“응, 가져왔는데.”

“그럼 나, 너랑 같이 앉아도 돼?”


나는 우림이의 부탁에 조금 기뻤다. 실은 조금이 아니라 꽤 많이. 한 자리에 같이 앉아서 그림도 그리고 도시락도 먹으면서 하루를 보내면 우림이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우림이가 내게 ‘부탁’을 했다는 것은 나도 언젠가 우림이에게 ‘부탁’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좋은 자리를 찾아보자고 했다.


우리는 이십여 분을 자리를 찾으며 돌아다니는 데 썼지만, 그중에 일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봤지만, 조금도 불안하거나 떨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조금씩 선명해지는 햇살처럼, 커져가는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게는 기분 좋은 느낌만 남아있었다.


우리는 9시 반이 조금 넘었을 즈음에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폈다. 서로 가방과 신발로 돗자리가 날아가지 않게 모서리마다 놓아두고, 옆에 있는 벤치에는 서로 쓰는 도구들을 올려두었다. 나무 그늘이 우람하고 앞에 보이는 산책길이 예뻐서 그림을 그리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넌 어디 그릴 거야?”

“나는 앞에.”

“그래? 그럼 나는 뒤쪽 그려야지.”


소소한 라이벌 의식이 다시 불붙었지만 여전히 나는 명랑한 상태였다. 하루의 예감이 좋은 걸 보니 잘하면 상을 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림이와 같이 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통에 물을 뜨러 다녀왔다.


먼저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종이에 자국이 남지 않도록 느슨하게 연필을 쥐고 흐릿한 선으로 형체를 그려나갔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할 뿐, 학원에 다니거나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구도를 잡거나 그리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스케치를 어느 정도 하고 전체적으로 보았는데 영 별로여서, 조금 속상하고 자신이 없었다.


그때 화장실에 간다던 우림이가 금방 돌아왔다.


“야, 나 물통이 없어서 저기 명원초 애들이랑 같이 앉으려고 하거든. 괜찮지?”


우림이는 내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내가 괜찮은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물통은 나도 있는데…. 내 거 같이 써도 돼.”

“아냐. 쟤가 하나 더 있다고 나 쓰라 그랬어.”


우림이는 더는 별 말 없이 가방을 쌌다. 그리고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은 채로 어딘가로 뛰어갔다. 나는 벤치 쪽으로 앉으며 목을 빼고 우림이가 간 곳을 보았다. 서너 명이 앉아있는 자리에 우림이가 즐겁게 웃는 얼굴로 들어가 앉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속상함과 서운함을 느꼈다.


물통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게 정말일까.


아니겠지. 같은 초등학교 애들, 친했던 애들이랑 있으려고 한 말일 거야. 나보다 쟤네가 더 좋으니까, 더 친하니까. 나랑 있으면… 어색하고 재미없으니까.


한숨과 함께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약간 차올랐지만, 흘리고 싶지 않았다. 손과 마음이 떨렸지만 아무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작년 삼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학교로 와서 쭈뼛거리며 교실 앞줄에 앉고 멀뚱멀뚱 주변의 소리만 듣고 있던 나는, 조금씩 친구를 사귀었고 이제는 2학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가장 나를 힘 빠지게 했다.


아직 초록빛이 울성한 단풍나무들 사이로 들어와 내 뒷모습 위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햇살이 따듯했지만, 나는 몹시 시린 마음을 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곁에 없어서 혼자라도 두 팔을 뻗어 스스로를 안고 있다는 기분은, 잔뜩 물을 머금은 붓을 들었지만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그만 떨어뜨린 바람에 금세 울어진 종이 같았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마저 스케치를 했다. 아까는 그렇게도 예뻐 보였던 산책길의 풍경이, 한숨과 눈물이 지나간 후에는 아무 색깔도 특색도 없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애써 스케치에 집중하고 그림을 어떻게 그려가야 할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것 말고는 보잘것없는 나를, 혼자인 나를 초라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중학교에 온 뒤로는 늘 그런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온 듯했다.


스케치를 마치곤 근처에 있는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뽑아 마시며 숨을 돌렸다.


가방에서 물감통과 팔레트를 꺼냈다. 그런데 붓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가방의 앞주머니와 속주머니를 뒤적이고 모든 책과 짐을 다 꺼내놓았다.


붓이 없었다.


얼마간 나는 얼이 빠져서 멍하니 있다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림대회에 오면서 붓을 안 가져오다니. 물통을 안 가져오는 것보다도 한심하지 않은가. 내 자신이 그렇게 한심스럽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저리는 다리를 곧게 피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붓을 어디서 빌려야 하나, 선생님께라도 가서 여쭤볼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기본 중의 기본이 안 되어있다며 한소리라도 들을까 싶어 관두었다.


그러다 우림이가 앉은 자리로 시선이 갔다. 우림이는 다른 교복을 입은 애들과 같이 있었다. 그 무리는 내가 속한 무엇도, 내가 아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 무리에 있는 우림이는, 내가 다가갈 수 없고 말을 걸 수도 없는, 다른 학교 학생이나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지 않을까. 가서 빌려달라고 말해볼까. 계속해서 고민했다. 용기를 내보자. 가보자. 생각은 나아가고 있었지만 발은 제자리에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를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붓 하나 빌리러 가는 것이,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뭐 그렇게 힘든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부탁하는 일이 어려웠다.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는 일은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게 느껴졌다.


만일 정말로 우림이에게로 가서 붓을 빌려달라고 말하면, 우림이는 어떤 표정으로 날 쳐다볼까. 상상만 해도 나는 손끝이 떨렸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끝, 쥐지 못한 손끝엔 물기 없는 바람이 스쳤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우림이는 내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우림이에게 부탁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체념하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를 모으고 무릎을 끌어안고, 밀려들고 차오르는 모든 어둡고 무거운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런 자세를 지키고 있어야만 그 감정들이 내게서 빠져나가 나의 초라함을 들키게 만들지 않을 것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의기소침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느껴졌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내 내 시야에는 나무들만이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고사리풀 같은 초록색 이파리가 셀 수 없이 매달린 단풍나무, 이름 모를 아름드리나무, 그리고 곳곳의 선명한 색과 향을 가진 꽃들, 잔디밭, 하얀 꽃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끼풀, 볼 때마다 여린 풀을 뜯어서 노란 진액을 보고 냄새를 맡곤 하는 애기똥풀…… 그렇게 찬찬히 둘러보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엔 내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감상의 씨앗에서 줄기로, 이어서 꽃으로, 생각이 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불현듯 나는 붓 대신 나뭇잎으로 색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붓처럼 섬세하고 정확한 표현이나 칠은 어렵겠지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리는데 나뭇잎으로 색칠을 한다면 느낌이 더 살아나지 않을까.


돌연히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나는 금세 찬연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돗자리 밖으로 나가 주변을 돌아다녔다. 주변뿐 아니라 더 멀리까지 가서 나무들을 관찰하고 땅을 훑어보았다. 붓으로 쓸 만한 나뭇잎을 찾기가 쉬울까 싶었지만 붓으로 쓸 나뭇잎을 찾으러 다닌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엔 참 많이 했었는데. 비록 보물이 쓰인 쪽지를 찾아본 적은 정말 손에 꼽지만, 사실 보물찾기는 정말 보물을 찾아야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찾으러 다니는 것이 즐거운 법 아닌가. 나는 나만의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공원을 산책하듯, 눈에 아름다운 모든 것을 담으려는 듯이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높아진 태양에 햇살이 뜨거워졌지만, 간간이 부는 바람은 상쾌하고 시원했다.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얇고 길거나 잘 부서지지 않는 나뭇잎들을 주웠다. 교복 상의에 넣어 오느라 하얀 상의가 조금 더러워졌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금세 명랑함을 되찾았다. 나만의 명랑함, 즐거움, 재미를 되찾은 것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나는 붓 대신 나뭇잎 줄기를 잡고, 이파리에 물을 적시고 물감을 묻혔다. 그리고 열심히 색칠을 했다. 종이에 나뭇잎이 닿았다. 나뭇잎은 부드럽게 구부려지며 흰 종이에 색을 묻혔다. 그 색칠 하나에 나뭇잎의 향, 나뭇잎이 원래 달려있던 나무의 향까지도 담기는 듯했다. 아울러 나의 즐거움, 나만의 기쁨이라는 보물을 찾아낸 행복한 기분마저도 향기로운 색들로 물드는 듯했다.


생각은 좋았지만, 실제로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얇고 끝이 뾰족한 이파리라도 섬세한 칠을 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케치한 선을 넘어가지 않게 칠할 수도 없었고 색의 명암 표현을 하는 데에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게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토록 아무 걱정 없이, 그저 즐겁고 편안했던 적이 있었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집의 벽이나 8절지 스케치북, 달력의 뒷면에 낙서하기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처럼…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즐겁다고 느꼈다. 아무도 가지지 않은, 가장 특별한 붓으로 그리는 나만의 그림.


나는 오롯이 그 순간을, 그 오월의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나는 한 그림 속의 완벽하게 어우러진 정물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동안 나는 그때 그 순간을 자주 생각했다. 보통의 나는 우울이나 외로움을 더 자주 생각하고 곱씹곤 했었는데,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더욱 되새기고 의미를 갖는 경험은 처음이라 스스로도 신기했다.


혹시 대상이라도 받는 건 아닐까? 나뭇잎으로 그림을 그린 나의 기발함을 심사위원들이 알아보고서 말이야. 그런 기대가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 달 후, 그 대회에서 우리 학교는 아무도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미술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선생님은 기대했던 몇몇이 수상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때 같이 미술실에 앉아있던 우림이는 퍽 속상해했다.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속상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혼자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무덤덤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 우림이는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그날 그렇게 더웠는데 엄청 열심히 그렸는데. 상도 못 받고. 짜증나.”


우림이는 투덜거리며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글쎄,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안 속상해?”


나의 평온이 우림이한테도 선명히 비친 모양이었다. 나는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응. 별로.”


그리고 원래의 나다운 빠른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문밖으로 나가 햇살을 맞았다. 학교의 울타리 안에도, 이 작은 교정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미소 지었다.


나는 나뭇잎으로, 흐릿한 선 몇 개만 그려져 있던 종이에 그 여름날의 풍경을 그리고 색칠하던 그 날을 생각만 해도 기뻤다. 그 기쁨을 오래도록 곱씹어도, 조금도 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그때 내 마음속은, 이미 작은 하나의 풍경이고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풍경을 칠하고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오롯이 나였다.


그리고 내 마음의 풍경은 여전히 색을 덧칠하며 키워지고 있다.






이전 11화 green fields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