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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부동산 소파에 함부로 앉지 말 것

첫 번째 부동산 방문기

by 밀도

2023년 12월 중순의 어느 날.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업무 관련 짧은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문득 오늘이 꽤 괜찮은 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일주일 내내 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그날만큼은 따사로운 햇살이 날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햇볕을 쬐면 생성된다는 행복호르몬의 일종 세로토닌의 영향이었을까? 평소에 잘 느낄 수 없던 설렘과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 보고 싶은 물결이 내 안에 일렁였고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 오늘이 딱이야!’


조만간 한번 제대로 알아봐야지, 라며 맘속에 품고 살았던 <나만의 작업실 구하기 프로젝트>는 그날 그렇게 시작되었다.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핸드폰을 열어 주변의 ‘부동산’을 검색했다. 골목을 살짝 돌자 좀 전에 검색한 부동산이 보였다. 연식이 오래돼 보이는 간판이 달려있었다. 막상 부동산 출입문을 한 발짝 앞에 두고 보니 긴장이 되었다. 오늘의 일정이 약간 충동적인 것 같기도 해서 손잡이를 당길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나의 마지막 부동산 방문은 대략 5년 전.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매매계약하고 나서는 부동산에 갈 일 없이 살았다. 부동산의 분위기가 어땠더라? 너무 오랜만의 부동산 방문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쓸 건 없을 터였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손님을 마다할 곳이 있을까?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마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중개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사장님이신 것 같았다. 나는


“안녕하세요오!”


라고 인사하며 몸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는데 중개사님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시며 나를 바라보셨다.

‘무슨 일이시죠?’라고 눈빛이 묻고 있었다. 그래, 일단 물어보는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소파에 걸쳐 앉으며 용건을 말씀드렸다.


“혹시 상암동에.... 조용히 작업실로 쓸만한 곳이 있을까요? 아, 제가 쓸 건데요, 그냥 혼자 조용히 글 작업할 만한 데를 찾고 있거든요”


적당히 여유 있는 느낌으로다가 가볍게 물어보지 뭐, 라고 생각했고 제법 괜찮았다고 느꼈다. 한편으론 약간 떨렸다. 과연 뭐라고 답변해 주시려나? 내가 원하는 매물이 많이 있으려나? 아마도 컴퓨터로 찾아보면서 얘기해 주시겠지? 아니다, 이 중개사님은 왠지 컴퓨터보다는 손글씨 노트파 이실 것 같아! 찰나였지만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었다. 내 몸은 점점 더 소파에 깊숙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드디어 중개사님께서 입을 여셨다.


“몇 평에 얼마 생각하시는데요?”


“.....네?”


맙소사.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 건 생각 안 했으므로.

나는 왜 ‘질문의 다음은 대답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질문을 드리면 중개사님은 곧장 이것저것 찾아보신 후 몇 평에 얼마짜리 매물들이 있다고 답해주시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몇 평에 얼마짜리를 원하는 것인지도 생각 안 하고 부동산에 방문한 내가 매우 부자연스러운 손님이었다. 공간의 종류, 가용할 수 있는 돈, 원하는 면적 다 내가 먼저 읊었어야 했다.


현실적인 질문을 받았지만 바로 답할 수 없었기에, 재정비 후에 다음에 다시 와야 할지를 고민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슬금슬금 뒷걸음쳐 어서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고만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매우 안 좋았다. 잽싸게 다시 나가기엔 내 엉덩이가 소파 위에 너무 편히 붙어있지 않는가! 권하지도 않았던 소파에 내 멋대로 앉아있던 터라 쉽사리 일어나기 민망했다. 심지어 목도리까지 풀어제낀 게 눈에 들어왔다. 이미 조용히 나갈 순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좀 더 진행해 보기로 했다.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나는 부동산 공간을 둘러보며 여쭤봤다.


“엄..... 혹시 여기는 몇 평쯤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다행히도 이번엔 답을 해주셨다.


“여긴 5평 조금 넘어요.”


정사각형 모양의 아담한 공간이었다. 여사장님 한 분이 3인용 소파 1개, 데스크톱 놓인 책상 1개, 그 옆에 3단 책장 1개, 스탠드 정수기 1대, 큰 화분 2개를 두고 사용하고 계셨는데 그 정도가 최소한의 면적처럼 보였다. 내가 쓸 작업실은 약간 더 큰 공간이면 좋을 것 같았다. 한... 7평쯤? 보증금은 일단 1000만 원부터 던져보기로 했다.


“그럼... 7평 내외에 보증금 1000만 원 정도 하는 월세 있을까요?”


이때가 가장 두근거렸던 것 같다. 과연 그런 조건의 임대매물이 있을까?

사장님은 모니터를 몇 초간 살펴보시더니 ‘보증금 1000에 월세 65짜리 빌라’가 하나 있다고 알려주셨다. 오피스텔이나 상가도 있나 여쭤봤는데 그 가격과 그 평수로는 이 근처에 이거 하나뿐이라고 하셨다.


정확한 위치가 궁금해졌다.


“그 빌라 위치가 어디쯤인가요?”


내 질문을 들은 사장님은 대뜸 손을 뻗으시며 "저거!"라고 하셨다. 부동산 창문 너머에 붉은색 벽돌로 마감된 닮은 꼴 빌라 여러 채가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사장님은 그중 어떤 걸 가리키신 걸까? 나는 정확히 어떤 빌라가 ‘보증금 1000에 월세 65짜리 7평 빌라’ 인지 확신이 없었지만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같이 가 보실래요?라고 내게 물으셨으면 따라나섰을 텐데 그런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부탁드리지 않았다. 나에게 큰 의지가 없으신 중개사님의 행간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소파에 붙었던 엉덩이가 잽싸게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당장 급한 건 아니어서... 겨울 좀 지나고 다시 와 볼게요!”


풀어헤친 목도리를 재빨리 움켜쥔 채 그곳을 나왔다.

들어갈 땐 그토록 햇살이 가득했는데 어느덧 어둑해져 있었다.

겨울은 겨울이었나 보다. 그날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많이 추웠다.


*


부동산 아마추어 제대로 인증! 그날의 부동산 방문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앞으로 작업실 공간을 얻기 위해 부동산에 가게 되면, 글쓰기 작업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스토리텔링하지 말고 일단 원하는 평수와 가용 액수부터 말할 것. 심지어 그 사장님은 어떤 종류의 건물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으셨다. 빌라든, 오피스텔이든, 상가든 그런 종류보다도 더 우선하는 건 무조건 돈과 면적이라는 걸 잊지 말자.


5년 만에 직접 부딪혀 알게 된 것이라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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