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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 한소 Sep 26. 2022

모성애는 본능일까

학습과 본능이 아닌 최고와 최선의 경계에 서다

아이를 잉태하고 모성애가 생겼다. 그 감정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 알게 되면서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음식을 아기를 잉태한 것이 매개가 되어 섭취하며 영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주변 환경을 배 속 생명에게 맞춰가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뭔지 모를 감정이 아련하며 깊어지고 진해지며 조금씩 무언가가 실체를 드러낸다. 열 달을 배속에서 아기와 교감하는 동안 엄마는 더 따뜻하고 깊어지지만 그것 이상으로 강해지고 단단해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엄마를 무너지게 하는 입덧이라는 경험도 당연하다는 듯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대부분을 극복하며 모든 패턴을 아기에게 맞춰나간다.


드디어 아기가 세상과 마주하는 날 엄마는 지금까지의 그 사랑이 몇 천, 몇 백배나 더 커졌음을 인지한다. 처음으로 아기가 엄마의 몸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후 아기의 호흡을 느꼈을 때, 눈을 마주했을 때, 꼬물거리며 엄마 가슴에 안긴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을 때 결코 경험이 없었다면 느낄 수 없는 모성이 생겼다. 그것은 점점 커지고 부풀었다. 위대하고 대단한 모성.


모성본능은 말 그대로 본능이라고 믿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다른 건 몰라도 경험을 바탕으로 느끼고 이해한 모성만큼은 본능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의문이 든다. 모성은 본능일까? 자신의 노력으로 벅차고 힘든 일을 감당할 때 본능이라고만 치부하기에 모성은 지나치게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고 벅차고 부담이 된다면 그건 모성을 본능이라는 틀 안에 가둬뒀기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 같다. 모성을 의식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돌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이 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모성을 생각하면 엄마 까투리가 생각난다. 온몸으로 그림책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 까투리_권정생]에서는 모성을 엄마인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것처럼, 그것을 벅차다고 여기는 우리의 의무를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모성도 학습이 가능하다고 믿는 우리에게 진정한 모성에 대하여 긴 여운을 남겼다. [다이브], [가재가 노래할 때], [낙원], [넬라의 비밀 약방], [총 4권으로 구성된 나폴리 4부작] 등 많은 책에서 여러 어머니가 등장하고 그들 모두 다양한 어머니의 상을 보여준다. 책에서 조차 엄마 까투리가 새끼들을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보여준 깊은 모성, 모성본능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그건 아니리라. 권정생 작가님은 책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 모성애의 위대함을, 더 나아가서 숭고한 희생정신의 아름답고 경이로움을 전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이 책은, 읽는 나에게 모성애를 강요하고 그것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행하지 못한 나의 내면에는 부도덕함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라는 죄책감마저도 안겨준다. 


책 속에서의 엄마의 사랑 모성애는 다양한 모습으로 비친다. 대자연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하지만 모성은 자연과 같이 무심하지 않다. 견디게 하는 자연만의 방법과 힘이다. 모성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물론 책에서의 모성은 대자연과 견줄 만큼 위대하다. 엄마 까투리의 사랑의 실천은 과연 아홉 마리의 아기들의 독립적이면서 단절되지 않은 세대 전환까지 계산된 모성을 발휘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엄마 까투리가 온몸이 재로 되어버린 후에도 새끼들을 지키려는 한 마음이 다음 날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온 박서방에게도 전달이 되었던 걸까? 문득, 박서방의 모습에서 현실의 제삼자의 모습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우리의 모습에서 여러 박서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박서방, 엄마 까투리의 모성에 감동을 하지만 이기적인 맘이 깃들여 있는 박서방, 동물을 학대하는 박서방 등 다양한 박서방이 존재한다. 과연 우리 시대의 박서방은 위대한 모성을 이해하고 그 사랑이 위대하고 숭고하다고 경탄하며 어미를 대신하여 새끼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책에서의 박서방처럼.


산에 불이 나자 본능적으로 날아오른 어미 꿩을 비난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생존 본능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고 강한 본능이다. 생존 본능과 모성 사이를 오가며 움직이던 어미 까투리의 모성은 결국에는 생존 본능을 뛰어넘는다. 학습된 모성이든 모성본능이든 수많은 갈등으로 생존과 모성 사이를 오갔다. 그 사이 어미의 간절함과 초조함이 내 감정 전체를 덮으며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마침내 어미 까투리는 모성애를 발휘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아홉 마리의 새끼들을 지킨다. 새끼들의 영속된 삶과 종족 번식까지 어미 꿩은 계산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모성이 그것 이상으로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수많은 경계에 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선택에 있어서 그것은 긍정의 출발일 수도 부정의 시작일 수도 있다. 경계에서는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도 가장 잘한 선택이 될 수도 없다. 그저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다. 그저 최선의 노력을 할 뿐이다. 엄마 까투리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모성이 최선의 선택이고 최선의 노력이었을 거다. 비록 누구에게는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의무를 강요받는 느낌이었겠지만 엄마 까투리의 모성을 왜곡할 수는 없다.


모성애는 본능이든 학습으로 만들어졌든 그 어떤 감정보다 고귀하고 강력하다.


수많은 경계에서 오늘 다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다만, 너무 애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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