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35년 차 되던 해에 퇴사를 했다. 누군가가 희망한 퇴직이지만, 희망의 주체가 누군지는 글쎄...... 어쨌든 나는 아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자유 시간에 그동안 놓쳤던 영화와 드라마시리즈들을 각종 OTT를 활용해 감상하고, 웹툰과 웹소설도 읽으며 뒹굴 거리다 늦잠도 자고 마음껏 게으름 피워봤다. 어, 생각보다 좋은데?
각종 김치 담그기, 장아찌 만들기, 차돌박이 쌀국수, 피자, 쿠키 만들기 등 그동안 안 해 보던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도 하면서 새로운 재미에 푹 빠졌다. 회사 관둬도 살만한데?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회사 관두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내가 우매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태풍 치던 어느 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기다. 음, 그런데 어느 바다로 가지? 동해는 일출이 아름답고, 서해는 일몰이 아름답고, 남해는 청정 바다로 반짝이는 해수면이 일품이라, 저마다 각각의 매력이 있는데?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가 남해로 일년살이 가면, 놀러 올 거냐?",
"너무 멀어. 안 가.",
"한 번쯤 가는 거 생각은 해볼게. "
'매정한 것들' 하고 생각했다.
"그럼 서해로 가면 자주 오냐?",
"미세먼지 때문에, 안 갈래.",
"차 막혀."
'숨은 왜 쉬냐, 얘들아.' 하고 생각했다.
"그럼 동해로 가면?",
"한 달 얹혀도 되냐?"
"자주 가도 재워 줄 거지?"
'얘들 봐라. 뭔가 어조가 다른데?' 하고 느끼는 순간,
"뫼이야? 안 돼!"
이번엔 내가 비명을 지르며 웃고 말았다.
내가 어느 바다로 여행을 자주 갔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동해를 그것도 속초를 가장 많이 찾았네?’ 한 달에 최소 한차례 이상, 평균 두세 번 정도는 꼭 갔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 동해로 가는 거야. 까짓 거 속초 일년살이 한 번 해보자!
여인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랬다고, 나는 당장 노트북을 열고 속초 부동산 매물들을 검색했다. 줄이 죽죽 그어진 이미 거래 완료된 매물이었지만, 바다 보이는 집을 중개했던 글이 있는 부동산으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바다 보이는 집 있나요?" 했더니, 마침 속초에 딱 하나 나왔단다. "그럼 그 집 잠시 홀딩해 주세요. 태풍이 모레 동해로 빠진다니까, 모레 오전에 속초로 출발할게요."라고, 진심을 담아 예약을 했다.
서울에서 서둘러 출발한 나는,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중개업자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집을 보러 갔다. 방 3개, 거실 1개, 욕실 1개를 갖춘 25평형 복도식 아파트였다. 안방과 거실에서 속초해변이 정면으로 보이고, 작은 방 창문으로는 청초호가 보이는 소박하지만 정감 가는 집이었다.
집주인이 침대, 화장대, 식탁, 소파, TV,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붙박이장까지 놓아둔 상태였는데, 빌트인에서 살고 있던 나로서는 오히려 안성맞춤이었다. 걸어서 속초해변으로 산책을 갈 수도 있고, 차로 7분 이내 쇼핑이나 관공서를 갈 수 있었다.
중개업자는 고성에도 바다 보이는 집이 두 개 더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서울에서만 50여 년을 살았기에, 어느 정도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스포츠 문화생활도 가능한 곳에 있는 바다가 보이는 집을 원했다. 그런데 속초에서 처음 만난 이 집이 그러한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이 집으로 할게요. 집주인한테 연락해 주세요, 가계약금 넣겠다고."
첫눈에 반한 바다 보이는 집은 그렇게 30분 만에 가계약 완료했다. 본 계약서를 쓰러 열흘 후쯤 만나기로 하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속초해변으로 나섰다. 파도와 함께 상쾌한 바닷바람이 잘했다고 환영하듯, 다소 격하게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반겨주었다.
오늘따라 속초해변이 더욱 편안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백사장 흔들 그네의자에 앉아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나, 바다 보이는 집 계약했어."
"뭐, 진짜? 저질렀어?"
"응"
"설마 했는데, 실행력 장난 아니다."
"에헤헤, 놀러 올 준비를 해라, 얘들아!"
여행객과 현지인 그 어디메 아직은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운치 있는 속초해변 밤바다를 음미하다가, 서울로 향했다.
"기다려라, 속초야.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