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의 육아일기-9
부모가 이혼을 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조숙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수진이는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생각하는 거나 말하는 게 참 조숙하다. 게다가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이모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초등학교 4학년인 사촌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가수나 탤런트들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넘는 편이다.
연예인들의 이름을 외우고 스타의 사진을 다이어리에 붙이고 다니는 등 꽤 나름대로 조숙한 행동을 하곤 했는데... 물론 수진이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은 주로 젊은 남자들이다. 탤런트 중에는 장동건을 좋아한다. 수진이가 어렸을 때 '이브의 모든 것'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는데 이때 드라마에 빠져 넋을 놓고 보았다.
드라마 중간에 장동건이 옷장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수진이가 '와! 짱이다' 라며 소리를 질러 나를 놀라게 하더니만 그다음부터는 자신도 옷장 문을 열 때면 꽤나 심각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히곤 해서 나를 웃게 만든다.
이보다 먼저 시작된 연예인 바라기는 '별은 내 가슴에'의 강민 오빠였다. 이 드라마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도 졸라, 테이프를 사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놀이방에 데려갈 때 틀어주었을 만큼 수진이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조숙한 편이다. 나 또한 대중가요라면 그 관심이 둘째 가면 서러워하는 철들지 않은 어른이라, 한국에 있을 때에는 가요 프로그램을 자주 보던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소라의 프러포즈'는 빠지지 않고 챙겨 보았었는데 수진이는 내가 '이소라의 프러포즈'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토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엄마! 오늘 프러포즈 볼 거야?'라고 묻곤 했었다.
이윽고 '이소라의 프러포즈'가 방영된다는 광고가 나오면... 이 꼬마 아가씨는 갑자기 바빠지는데... 집안의 불이란 불은 죄다 끄고 거실의 스탠드만을 켜놓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과 자신이 마실 오렌지 주스 한 컵, 그리고 엄마가 먹을 안주로 포테이토칩을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엄마! 이소라의 프러포즈 해, 빨리 나오세요' 하며 엄마를 위해 근사한 토요일의 심야 파티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진이와 나는 캔 맥주와 오렌지 주스잔을 부딪혀 '건배'를 외치며 '이소라의 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모녀만의 토요일 밤을 보내곤 했었다. 이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딸아이와 주말을 이렇게 보내는 내가 처량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서 아이가 잠들고 난 후,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하지만 차츰 이 생활에 적응이 되자 이렇게 편한 생활이 없는 것 같았다. 우선 남자 하나가 나감으로써 가사노동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늘 애 아빠 손에만 있던 텔레비전 리모컨도 이제는 내 손안에 있게 되었다.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볼 수도 있고... 보기 싫을 때에는 텔레비전을 끌 수도 있었다.
나도 소파에 길게 누워 보고 싶은 비디오를 빌려다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었고, 애 아빠의 취향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내 마음대로 오디오에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주말의 풍경이 나와 수진이 위주로 달라진 것이다. 수진이와 나는 토요일 밤마다 '이소라의 프러포즈'를 보면서 주말의 심야 데이트를 하곤 했는데 이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나는 수진이를 키우면서 거창하게 '이렇게 키우겠다'라는 구체적인 방침이나 목표는 세우지 않았었다. 다만 한 가지 딸아이가 엄마의 생각이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괜히 아닌 척 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아이에게 표현하겠다 라는 방침은 나름대로 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모두 나 편하자고 정한 일인 것 같았지만 어차피 수진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면서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나는 우리 집의 경제적인 상황이나 어려움, 그리고 엄마의 고민을 아이에게 숨기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수진이는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조숙한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이소라의 프러포즈'를 보면서 수진이가 심각하게 물어왔다. '엄마는 어떤 가수를 좋아해?' 하고 묻길래... '글세... 엄마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 것 같니?'하고 되묻자, 수진이의 입에서는 기다릴 겨를도 없이 '김장훈, 박진영, 윤도현...' 하고 가수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마지막 한마디... '그런데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는 죄다 남자들이네, 왜 그렇지?'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면서 '아니, 이 쪼그만 계집아이가 엄마를 갖고 노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수진아, 저 가수 노래 너무 잘하지 않니?' 하고 물어보았던 가수들이 모두 남자 가수들이었고 내가 남자 가수들 노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아마도 텔레비전 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수진이에게는 남자 가수들에게 눈독(?)을 들이는 걸로 보였던 것 같다(물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엄마는 남자 가수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노래 잘하는 가수들을 좋아해'라고 말을 건넸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역시 나는 여자 가수들보다 남자 가수들의 노래를 더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혼자 살면서 남자 가수들에게 눈독(?)이나 들이는 이 엄마를 딸아이는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수진이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어떤 것일까? 고민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