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면 반갑다고 “안녕하세요”. 헤어질 땐 아쉽다고 “안녕히 가세요”. 우리는 매일 ‘안녕’이란 말을 최소한 서너 번은 하고 산다. 그만큼 만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고,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아침에 어른을 만나면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며 간밤의 안부를 묻는 것도 ‘안녕’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가를 알려준다. ‘안녕’의 편안할 안(安사)과 편안할 녕(寧)은 몸과 마음의 고요함, 그 속에서 삶의 성찰을 얻는 상태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의 ‘안녕’이 수시로 위협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민이 위험에 처한 상황은 수없이 많다. 외세의 침략과 전쟁, 국가 내부의 분열, 잘못된 신념과 사익을 위한 국가적 폭력과 민주의 파괴,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본주의와 양극화 등 굵직한 부분으로만 나눠도 끝없이 우리의 안녕은 위협받고 있다. 전 인류가 고통받는 기후 위기를 넘은 기후 재난 상황도 만만치 않다. 너무 두루뭉술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어이없게, 또한 너무도 느닷없이 우리의 안녕을 덮친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사건, 사고를 찾아봤다.
1991년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 1993년 청주 우암아파트 붕괴, 1993년 구포역 무궁화 열차 전복 사고, 1993년~1994년 지존파 사건, 1993년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1993년 서해 페리호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이때는 나도 현장에 있었다),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 1999년과 2002년 연평해전, 1999년 씨랜드 화재,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2010년 천안함 폭침 외에도 수많은 대형 사건, 사고들이 우리의 안녕을 수시로 위협하고 있다.
사회안전망이 더욱 강해진 현재에도 우리의 안녕은 안녕하지 못하다. 세월호 침몰로 우리의 푸른 고래들이 바다에 잠들었고, 이태원 참사로 꿈꾸던 새들이 날개를 꺾었다.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는 의무가 불안이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길은 나선 노동 현장은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해야 하며, 퇴근 후 여유 시간에도 우리는 언제 덮칠지 모르는 안녕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길을 걷는 것조차 살피며 두려워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안녕’은 도대체 어떻게 안녕할 수 있을까. 생명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은 이제 그만이길 간절히 바란다.
그뿐만 아니다. 기술 발달로 형태를 바꾼 중독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안녕’을 위협한다. 청소년부터 위협하는 마약은 물론, 온라인 도박, 과도한 투기, 나날이 교묘해지는 다양한 온라인 사기는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세대와 계층 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남성과 여성의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조직 간의 합의와 협력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나마 나는(세상을 산 지 꽤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안녕이 덜 위협받던 시대에 살았다고 위안한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어르신들이, 아니 모든 사람이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사회, 일상의 안전은 최소한의 보장받는 사회를 말한다면 이상주의자라 하겠다. 하지만 매일의 생활에서 안전을 걱정하고, 그래도 이 마음은 변치 않는다. ‘안녕, 안녕.’하면서 우리의 ‘안녕’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안녕, 안녕!’하면서 우리의 ‘안녕’에게 반갑게 만남의 인사를 전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아들, 딸이 살아가는 그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