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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26. 2020

가을걷이

고구마 줄기를 다듬으며

10월 말, 가을 추수 막바지 때 일이다.
부지런한 집들은 진즉 가을걷이에 나섰지만
올해 영 게을러진 나는 좀 늦었다.

이 가을에 거두어들일 작물은 고구마.
7월 초 텃밭 이웃에게 얻은 고구마순을 심어서 기른 거라 밑이 영그는 100일을 넘겨서 10월 마지막 주말이나 11월 초에 캘 계획이었다. 그래서 고구마 캐기 전에 열심히 고구마 줄기를 따먹느라 한동안  자주 텃밭에 들락거렸다.
손바닥만한 땅에 제법 고구마 줄기가 번창을 해서
일곱 집에 나눔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볶음 해서 잘 먹은 건 두말할 것도 없고,


그 작은 땅에서 이렇게 풍성히 먹을 게 생기다니!
정말이지 텃밭은 보물창고다.
이러니 5년째 손을 못 놓고 할 수밖에.
아마 내년에도 별 이변이 없는 한 텃밭을 하게 될 거다.

보름 전쯤 어머님께서 무지 분주하셨더랬다.
아는 분 밭에서 고구마 줄기를 왕창 얻어오셔서 손질하신 뒤 씻고 삶고 말리고 해서 겨우내 두고 먹을 고구마 줄기를 갈무리하신 거다. 가을볕이 좋을 때 이리 해두면 겨울 동안 귀한 나물을 먹을 수 있다.

"와~ 그 많던 고구마 줄기가 말리니까 얼마 안 되네요."

"긍께 말이다. 그래도 이거 뿔려서 나물하믄 꽤 되아야. 고구마 캐믄서 걍 밭에 놔두면 버려지는 것잉께 얻어왔다. 뜯어다 이리 갈무리 해놓으면 한동안 야곰야곰 꺼내먹을 수 있응께 부질부질 해놔야제. 참 우리 집 고구마는 언제 캐냐?"

"10월 말에나 11월 초에 캐려구요."

"그래? 그람 그전에 고구마 줄기 뜯어오면 되겄구나. 캘 때 되믄 말 하그라~."

그리 해서 첫서리 내리는 상강이 되던 날,
아직 고구마를 안 캤지만 캐느라 줄기 상하기 전에 따오신다고 어머님께서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가셔서 고구마 줄기를 다 뜯어오셨다.

고구마 줄기는 다 좋은데 껍질 벗기는 게 일이다.
소금물에 30분쯤 담궜다 하면 잘 벗겨진다더라,
끓는 물에 데쳐서 하면 잘 벗겨진다더라,
하면서 다양한 껍질 벗기기의 묘수가 등장하지만 그냥 이렇게 고부간에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두 손으로 고구마 껍질을 까는 게 장땡이다.

어머님은 두 손에 고구마 껍질 까기용 전용 미니 고무장갑을 끼시고, 난 그것도 번거로워서 그냥 맨 손으로 했다.

"너 볼 일 보라니까~ 나 혼자 쉬엄쉬엄 할란다."

"혼자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세요? 안 바쁘니 옆에서 저도 할게요."

"손에다 뭐 좀 끼고 하지 그러냐? 손꾸락 다 시꺼메질 텐디."

"손도 큰데 뭐까지 끼고 하면 더 둔해져서 까기 힘들까 봐요. 누구 보여줄 손도 아닌데 뭐 어때요~^^"

"그래도 여자는 그게 아니제. 손끝이 드러우면 어디 가서 여러워야.(부끄럽다는 전라도 사투리)"

"기왕 묻힌 거니 그냥 할게요~ 어머님^^"

깔끔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는 분이라 며느리 손 시커메질 것까지 염려하시며 고구마 줄기 까기에 돌입!

너튜브로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 메들리를 들으시며

"거 노래 자알 한다~! 생긴 것도 자알 생겼고~"
추임새도 넣으시고,

독감 예방접종 맞고 죽은 사망자가
또 나왔다는 TV 뉴스에

"작년까진 독감 맞고 누구 죽었다는 말이
전혀 없든만 올해는 왜 그런다냐?"
하고 걱정스러워하신다.

"안 그래도 아까 00가(큰아가씨) 전화했더라.
생전 전화도 안 하든만 그 동네서 70대 노인이 독감 맞고 1시간 만에 죽었다는 소식 듣고는 놀래서 엄마 독감 맞았냐고 전화했길래, 니 엄마 첫날 일찌감치 맞고 와서
지금까지 잘 살아있다~ 그랬. ㅎㅎ"

"그날 일찌감치 아침 드시고 엄청 빨리 다녀오셨잖아요. 올해는 코로나도 그렇고 진짜 뭔 일인가 몰라요.
친정부모님은 해남에선 사람들 너무 많아서 못 맞으시고, 다음 날 목포 병원에 가실 일 있으셔서 가셨다가 첫날은 약 다 떨어졌다고 해서 또 못 맞고 오시고, 다음 날 다른 병원 가셨다가 겨우 하나 남았다는 걸 부부가 해남에서 왔는데 어떻게 같이 맞고 갈 방법이 없냐고 하니까 어찌어찌해서 하나 더 구해다가 두 분이 맞고 오셨다는데,
그 날부터 뉴스 사망자 소식이 확 늘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주사 맞고 나면 뻐근하니 하루 정도는 좀 아픈디 금방 괜찮아져야. 별 일 없으시겄지~"

"이상하게 올해는 하나도 안 아프시다고, 병원에서 약이 하나밖에 없다더니 금방 두 개 된 것이 영 다른 약 주사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구요."

"뭐 그러기야 했겄냐. 안 아프시면 좋."

"저도 아직까진 별 일 없으셔서 다행이다 여기고 있어요. 일주일은 지나야 안심한다니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덕분에 잘 계신가 싶어 매일 안부전화 드리네요."

"전화라도 자주 드려라. 시간 나믄 찾아가 뵙고.
올해는 추석에도 못 가봐서 보고자프실 것이다."

"네~ 어머님~"

그렇게 수다 떨며 고구마 줄기를 벗긴 뒤
한 다라이 가득 담긴 줄기를 씻고 삶고 말렸다.
손이 빠른 어머님이시라 금방 하신다.
주말 동안 햇볕이 좋아서 거진 다 말랐다.
가을 햇볕 진짜 짱이다.
올 겨울엔 고구마 줄기 나물 실컷 먹겠네^^


고구마줄기에 묻어온 무농약 인증 달팽이
고구마줄기 마르는 과정. 하루하루 양이 팍팍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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