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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Feb 15. 2021

고무신 추억

신발 귀한 줄 알랑가~

일요일 저녁이면 우리집은 K본부의 1박 2일을 함께 본다. M본부의 런닝맨을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는 1박 2일 골수팬이다. 강호동이 나오던 1기부터 쭉~ 그래서 1박 2일 촬영지라면 우선 눈길이 가곤 하는데, 첫 촬영지였던 충북 영동의 월류봉은 우리 가족이 자주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제는 충남 논산에서 역사속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백제시대 도읍들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의 능사를 소개하는 화면을 보시더니 어머님께서

"늬들 강진 가서 무위사 구경 잘 했지야?"

하신다. 해남 친정 가는 길에 강진 어머님 고향집 뒷산에 묻히신 외할머님 산소를 찾곤 하는데, 여유가 되면 그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무위사도 종종 둘러보는 걸 아시곤 넌지시 물어보시는 말씀이다.

"거기 거북이 하나가 있는디... 거 뭐라드라... 이름은 잘 생각이 안 난다만 국보라고 했는디..."

아마도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를 말씀하시나보다. 국보는 29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가 지금은 본존불 뒤의 탱화만 남았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 소장하고 있는 무위사 극락전으로 국보 제 13호이다.

"그게 아마 탑비일 걸요? 절에 계셨던 분들 가운데 유명하신 분의 사적을 기록해둔 비석 아래 있는 거북이 말씀하시는 거죠?"

"잉~ 맞다. 내가 어릴 적에는 핵교에서 무위사 소풍 가면 커다란 거북이 구경하러 그 앞에 가곤 했는디, 그땐 무쟈게 컸는디 지금 본께 벨로 크도 안 하더라."

"요즘엔 하두 큰 게 많으니까 작아보이나 봐요. 그래두 무위사 탑비 아래 거북이는 지금 봐도 꽤 큰 편이던 걸요? 오래 되서 색깔도 까맣고. 며칠 전 본 하동 쌍계사 진감국사탑비 아래 거북이는 국보라는데 별로 안 크더라구요. 원주에 있는 법천사지나 거돈사지에 있는 탑비 아래 거북이는 진짜 크던데"

"그라든? 등산 다니면서 절도 참 많이 가봤는디 인자는 생각도 잘 안난다. 우리 어무니가 절에 가서 부처님 보고 손가락질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그래서 무심결에 손가락질하게 될까봐 무위사 가면 주먹을 이라고 꽉 쥐고 다녔던 기억은 지금도 똑똑히 생각나는디~."

어머님이 주먹을 꼭 쥐어 내보이시며 웃으신다.

"월출산 뒤에 도갑사로는 소풍 안 가셨어요? 거기도 유명한 절이잖아요."

"갔재~ 우리 때는 무위사 뒤로 난 산길 따라 월출산 넘어서 도갑사까지 걸어갔니라. 강진에서 영암 갈 때 월출산 돌아가려면 30리길이라 월출산 넘어서 그렇게 다녔지야."


"세상에 어른들이 넘기에도 힘든 산을 국민학생들이 넘어다녔다구요? 옛날 어른들은 체력이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겠어요. 일상이 극기훈련이셨으니~"

"ㅎㅎ~ 그땐 다 그라고 살았응께. 한 번은 월출산에서 내려가다 신고 간 고무신 코가 쫘악 찢어지는 바람에 담임선생님이 '아버지한테 신발 하나 사달라고 하거라.' 하신 말씀이 얼매나 부끄럽던지 지금도 그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져야. 그래도 신발이 귀한 때라 그 신발을 못 버리고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가져와 바느질로 꼬매서 다시 신고 다녔재.

2~3학년때까진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십리 길 넘는 자갈길을 걸어 핵교까지 다닌 때가 부지기수였어야. 운동장에서 애들이 고무줄놀이 하자고 해도 맨발인 게 챙피해서 하고 싶어도 못하고 구경만 할 때가 많았니라. 울고불고 해서 겨우 신발 한 켤레 사주시는 날은 머리맡에 새신을 고이 모셔두고 잤는디 그런 날은 꼭 신발이 물에 떠내려가서 멀리 가버리는 꿈을 꾸다가 '내 신발~~' 하며 울고불고 하다 잠이 깼당께.


큰언니가 신발장사하는 집에 시집을 가서 5학년 때부터는 신발을 원없이 신게 됐지야. 팔기 좀 거시기한 신발들 생기면 동생들 신으라고 집에 갖다주셔가꼬. 지금은 신발이 너무 흔해서 이런 얘기 하믄 다들 웃을 것이다."

"저 어릴 때도 신발 귀했어요. 장마때 신고 갈 신발이 없어서 할머니께서 파란 고무신을 신으라고 주셨는데, 그거 신고 학교 갔다가 어찌나 챙피했는지... 국민학교 3학년 때쯤이던가 그랬는데."

"너도 고무신 신고 학교 간 적이 있었냐? 니도 촌에서 살긴 살았다야. 신발 새로 사믄 발 뒤축이 늘 까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그래갖고, 신발 뒤에다 솜뭉치 넣어서 신고 다니곤 했는디..."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솜뭉치 대신 발뒤축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더랬다. 어릴 때 자주 불렀던 동요 가운데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란 노래가 있었는데 정말 극공감되는 가사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 남리장 신발전에 가서 이것저것 신어보고 새 신을 사던 기억이 지금도 설레임 가득 떠오른다. 아무리 신발 뒤축에 발이 까여도 새 신을 신는 기쁨은 컸다.

요즘 애들은 나이키 같은 브랜드 아니면 운동화도 아무거나 안 신는 세상이 되었고, 신발장에 신발이 넘쳐나는데도 신을 거 없다고 투덜대고 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어머님이 무위사 이야기하시다 뒤끝에 덧붙이신 말씀이 마음 한자락을 오래 붙든다.


"무위사 옆에 백운동정원이랑 경포대 가서도 어릴 때 물놀이 많이 했는디, 옛날엔 거기가 숲도 좋고, 물도 좋고 했단마다. 경포대 바위는 무지 높아서 올라갈라믄 어른들이 엉덩이를 아래서 받쳐주고 해야 올라갔는디 지금은 물도 많이 줄고, 바위 아래도 많이 메꿔져서 타박타박 계단처럼 바로 걸어올라갈 수 있게 됐더라."

뭐든 흔해지고 편해진 세상에 살면서 귀하고 어렵던 시절을 떠올리는 건 단지 향수만은 아닐 것이다. 너무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세상에서 신발 하나라도 소중히 아끼던 그 시절의 정신이 필요한 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요즘 대세인 미니멀리즘의 핵심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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