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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pr 13. 2021

내가 살아서 너를 몇 번이나 볼끄나...

아빠의 눈물

아빠 생신이 1월 하순에 있었으니,
석 달이 조금 안 되어 친정을 다녀왔다.

4월 9일 금요일 저녁에 시작한 창고방 정리를 마무리하느라 토요일 오전 10시 조금 넘어 출발해서, 중간에 영산포 홍어거리 들러 점심 먹고 오후 5시에 해남 도착. 하룻밤 자고 일요일 오후 3시에 대전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 평소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내가 아빠와 엄마를 한 번씩 꼬옥 안아드리며 한 달 뒤 엄마 생신 때 올 테니 그때까지 건강히 계시라고 작별인사를 드렸다.

올라가는 길에 시어머님 고향이자 시외할머님 묘소가 있는 강진을 들르느라 잠시 무위사 아랫마을에 머문 동안,
안방 화장대 약상자 아래 용돈 봉투를 슬쩍 넣어두고 온 것을 톡으로 말씀드렸더니,


"인숙아 다음부터는 용돈을 많이 주지 마라 내 가슴이 아프다"라고 엄마가 답톡을 주셨다. ㅜㅜ

많이 드린 것도 아닌데 이런 답을 주셔서 내 마음이 영 거시기했다. 해남 떠나기 전 우리가 먹을 것들을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주시면서도,

"엄마 살아있을 때 와야 이렇게 줄 게 있응께 나 살아있을 때 자주 와라잉?" 하셔서 마음이 울컥했는데...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대전에 저녁 8시 20분쯤 도착해서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렸을 때는 별말씀이 없으시더니, 월요일 오후 2시쯤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다.

"어제 너 가고 나서 아빠가 앞으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인숙이를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으까... 함시로 우시더라."

그 말씀을 하시면서 엄마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잦아들며 울먹울먹 하셨다. 내 마음도 다시 울컥.

"그랑께 너 시간 될 때 자주자주 오니라. 요새 니 아빠가 마음이 영~ 이상하신지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신다. 그라고 우리는 돈 있응께, 따로 용돈 챙겨줄라고 하지 말고. 올 때마다 그렇게 용돈을 줄라믄 부담돼서 자주 못 온단마다. 빈손으로 오기 정 써운하믄 과일이나, 과자나 사오등가 하재 돈 줄라고 하지 마라~ 잉?"

"알았어요~ 저도 드릴만한께 드리재. 돈 없으믄 드리고 싶어도 못 드려요. 그라고 내가 동생들처럼 용돈을 많이 드린 것도 아닌디..."

"아녀~ 한창 돈 들어갈 때잖애. 애들 학교 다닐 때보다, 졸업하고 취업할 때 되믄 그때가 돈이 더 많이 들어야. 요새는 취직이 금방 되는 것도 아닌께, 지금처럼 둘이 돈 벌 때 많이 저축해놔야 나중에 필요할 때 쓰재. 그랑께 우리 줄 생각하지 말고 너 애껴 쓰고 저축하란마다."

"네~ 알았어요 엄마. 그렇게 할게요~"

"아빠 들어오싱께 인자 끊어야쓰겄다. 그만 들어가라잉~"

그렇게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화장실을 갔는데...
아빠가 우셨단 말씀이 뒤늦게 눈물샘을 자극하더니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주책맞게 변기에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갈 때마다 살이 빠지시고, 무릎은 안 좋아지셔서 점점 걷기 불편해하시는 아빠. 올해 여든이 되신 아빠의 건강상태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가끔 가서 뵙는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니, 아빠는 더더욱 '이러다 언제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시나 보다. 그래서 자식들 가운데 가장 멀리 살면서 자주 못 오는(1년에 많아야 서너 번) 큰딸이 하룻밤 자고 떠나니 그렇게 마음이 미어지셨던 모양이다.

아빠가 우시는 걸 본 것은 재수를 시작하며 부모님께 각오를 말씀드렸던 1991년 설날이 처음이었다. 그 뒤로 2001년 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작은아빠와 고모들이 무슨 일로 편이 나뉘어서 싸우셨을 때(아빠는 9남매의 맏이시라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아버지처럼 돌봐주셨다), 내가 작년에 아빠 속상하게 해 드렸을 때.... 이렇게  번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를 보내시고 나서, 또 우셨다니 마음이 정말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집에 온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또 눈물이 나와서 울었다. 남편은 "그러니까 자주 찾아뵙고 와~"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어야 말이지.
그나마 이번엔 엄마 생신이 마침 5월 중순이라 5월 8일 어버이날에 맞춰서 다녀올 수 있게 됐지만 언제나처럼 해남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남편이 주말마다 하는 여행을 남도쪽으로 잡으면, 해남 근처 간 김에 친정 가서 부모님 뵙고 부모님 모시고 가까운 곳에 구경도 다녀오고 하면 좋겠구만 남편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지 나 보고만 자주 다니라고 할 뿐 자기랑 같이 가자고 먼저 말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나만 오는 것보다 사위랑 같이 오는 걸 더 반기시는데... 나 혼자 오면 김서방이랑 싸웠다냐~ 하면서 또 걱정하신다.

지난번 구례 산수유마을 여행 때도 산수유마을 풍경사진을 가족방에 올려드렸더니, 내친김에 해남까지 내려오려나~ 하고 아빠는 기대를 하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다음 날까지 아무 소리가 없으니, 왔다 갔으면 갔다고 얘기나 하지 어째 아무 말이 없다냐, 사고라도 난 건지 뭔 일이 생긴 건지~ 하고 아빠가 하두 걱정을 하셔서 엄마가 따로 전화를 하실 정도였다.

별 일 없다고, 급히 올라가서 이런저런 일 보느라 연락드리는 걸 깜빡했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그때 안 좋은 일이 있기는 했었다. 꽤 심각한 사건이었는데 다행히 잘 넘어갔드랬다. 그 일로 아빠의 촉이 꽤 예민하심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늘 자식 생각을 하시니까 그런 것일 테다.

아빠 연세가 올해로 여든.
평생 뱃살 한 번 잡히신 적 없을 정도로 몸을 잘 관리하시며 건강하셨던 아빠도 이제 이곳저곳 안 아프신 곳이 없으시다. 다행히 병원에 입원해서 누워계실 정도는 아니지만 노화로 인한 몸의 쇠락은 피할 길이 없다.


엄마는 이제 70대 초반이시지만 아빠보다 편찮으신 곳이 더 많으셔서, 60대 접어드시고부터는 늘 아빠보다 먼저 가시게 될까 봐 걱정이시다.

자식이 효도하려고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돌아가시고 제사 잘 지내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 정성으로 살아계실 때 더 잘해야지....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손잡고 얘기하고, 맛있는 것 함께 먹고, 좋은 곳 구경시켜드리는 것이 효도지.

아빠 살아계시는 동안 적어도 백 번 아니 삼백 번은 더 보실 수 있게 자주 찾아뵈러 가야겠다. 빈센조가 그랬다. "진짜 지옥은 평생을 후회하면서 사는 거예요."라고.
맞는 말이다. 부모님 뵈러 해남에 자주자주 가야겠다.

부모님 사시는 고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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