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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ul 08. 2021

호박 잡던 날

일상으로 돌아오다

2021년 7월 8일은

어머님께서 병원에 재입원하셨다가

3주 5일만에 퇴원하신 지 일주일,

처음 쓰러지신 날로부터 딱 두 달이 되는 날이다.

그간 너무도 많이 아파하시고

상태가 더 악화되시기도 해서

어머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보호자로서

'과연 이전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힘들 거야'라는 답이 나올 때가 많았다.

그런데 암울한 나의 예상과 달리,

재입원 3주만에 전해질 수치가 왜 자꾸 떨어지는지 원인을 알아내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치료를 시작하면서 어머님 상태가 아주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원 뒤 어느 날,

어머님이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때는 7월 4일 일요일.

장맛비에 밭상태가 궁금해서

새벽에 부지런히 텃밭 다녀온 뒤부터

아침 차리고, 집안일하고, 다시 점심 차리고,

어머님 챙기다보니 오후엔 진이 빠져 잠시 누워있는데...

거실에서 뭔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서걱서걱 소리가 들려왔다.

'뭔 소리래?'

비몽사몽중에도 궁금은 한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호기심천국인 채로 누워있자니, 밖에 있던 남편이 들어와선 일요일 오후인데 드라이브나 다녀오자고 깨웠다.

"에고고 허리야~"

하고 일어나 거실에 나가보니...

호박이 노오란 속을 까보인 채 신문지 위에 펼쳐져있었다. 어머님께서는 호박을 써시다 전화를 받으시곤 통화하시느라 잠시 방에 들어가신 모양이었다.

어머나 웬일이야~

이 커다란 호박을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오셨대?

(호박은 거실 옆 베란다 햇빛 잘 드는 곳에 두었더랬다)

어머님 칼 쓰시다 손 다치시면 큰일이라, 남편보고 혼자 드라이브 다녀오라 하고(아들이 나대신 끌려감. 아들아 미안~ 그래두 덕분에 좋은 구경했지?^^)

호박이 널부러져 있는 신문지 위에 칼을 들고 앉았다.

채칼과 칼을 이용해 끙끙대며 껍질을 벗기고 있으니, 통화를 끝내신 어머님께서 거실로 나오셨다.

"오메~ 이걸 니가 하고 있냐? 내가 하꺼신디 영광이모한테 전화가 와가꼬 통화하니라....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호박이 썩었나 안 썩었나 어찌나 걱정이 됐등가, 집에 와서 정신 차리자마자 욘석부터 딜여다봤구만. 보아하니 겉은 멀쩡하고, 두드려봉께 소리가 쪼까 이상한 거시 아무래도 오늘 호박을 잡아야쓰겄다~ 싶어가꼬 여따 판 벌렸어야. 상했을라나? 했는디 요라고 멀쩡하다야. 인자부텀 내가 할란다."

"아이구~ 어머니~ 잘못하시다 손 다치세요. 아직 힘쓰시면 안 돼요. 제가 할게요. 그나저나 이 커다란 호박을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오셨대요?"

"크기만 크재, 속이 텅 비어가꼬 벨로 무겁도 안 하드라~"

"아유 참~ 우리 어머니 이제 다 나으셨네요. 호박 상할 거 걱정하시고 이걸 들어다 거실에 가져와서 잡으셨으니^^"


"사돈어른이 애써서 키우셔가꼬 보내주신 건디 썩기 전에 얼릉 먹어야재. 이놈을 키울라믄 봄에 씨앗 심고, 물주고, 넌출(넝쿨) 정리하고~ 손이 얼마나 가셨겄냐? 이런 호박 사먹을라고 해봐라, 돈이 얼만가. 친정에서 막 주신께 니는 비싼지도 모르지야?"

"헤헤, 저야 뭐 어머님 호박 좋아하신다고 가져가라고 하시니 그냥 받아오는 거라 모르죠. 호박 중에서도 제일 좋은 거로만 골라서 주시던데요. 그래서 아직까지 안 썩고 있었나 봐요. 해남에 남은 호박들은 금방 썩어서 버리기도 했다고 하시던데..."

"그랑께 말이다. 인자 밭둑에 심은 호박이 자라서 애기머리통만해질 땐디 여적지 늙은 호박이 이라고 멀쩡한 거 봉께 신기하당께. 씨앗은 물크러져서 못 쓰겄다만 속은 이라고 암시랑토 안 해야~"

가만히 보고 계시기 그러셨는지 어머님도 식칼 하나를 더 가져오셔서 내 맞은 편에 앉아 껍질 깐 호박을 잘게 써는 일을 하셨다.

칼질하시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지 않으시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고부간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 나누며 뭔가를 함께 한다는 것이 아주 머~언 일인 줄 알았건만, 오늘 이렇게 하고 있구나~ 혼자속으로 감개무량해하면서 늙은 호박 한 덩이를 자알 잡았다.

솥에 한꺼번에 끓이기엔 너무 많아서 반만 넣어서 푹 끓이고, 나머지 반은 냉장고에 보관했다. 호박죽에 팥을 넣으면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B1의 섭취를 증가시켜준다니 남은 건 팥호박죽을 만들어봐야겠다.

그날 저녁,

어머님은 오래오래 폭폭 끓여서

부드럽게 물러진 호박물 한 대접을 아주 맛나게 드셨다.

전통적으로 호박은 수분조절에 효과적이어서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선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늙은 호박을 고와 그 물을 마시곤 했다. 호박물은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늙은 호박에는 비타민 A인 카로틴과 비타민C, 칼륨, 레시틴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이뇨작용과 해독작용이 뛰어나다. 그래서 회복기의 환자나 위장이 약한 사람, 노인에게도 아주 좋다.

늙은 호박은 회복기 환자이신 어머님에게 꼭 필요한 음식인 셈이다. 이 호박이 어머니 퇴원하실 날을 고대하며 안 썩고 버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장하다, 호박!

호박의 해독작용으로 그간 병원에서 줄줄이 달고 계셨던 수액들이 어머님 몸에 남긴 독을 말끔히 씻어주길~ 급성 뇌경색과 뇌출혈 후 어머님 머리에 남은 상처들도 흔적없이 잘 아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 5월 중순때만 해도 이랬는데...

https://brunch.co.kr/@malgmi73/189


생긴 게 왼쪽 호박이랑 비슷했음.  잡기 전에 찍어둔 사진이 없어서^^;;
호박 잡던 날 풍경
노오란 호박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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