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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5. 2020

주인이 없어도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문경 주암정

"이 정도면 거의 장마수준인데?"


비가 오는데도 휴일이라 나선 길이었다.

문경을 지나가다 눈에 뜨인 멋진 표지판, 주암정.

정자 근처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쏟아지던 비는 슬슬 멈춰가고, 막 모내기를 끝낸 앞논에는 가까운 산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41-2에 위치한 주암정은 17세기 지역의 유학자였던 주암 채익하 선생이 심신을 수양하던 곳으로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1944년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지금도 매년 이곳에서 종친회가 열리고 있다.

정면 3,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주암정은 배를 닮은 기암 위에 선실처럼 지었으며, 빼어난 풍광으로 가족관광객이 증가하면서 문경의 명소가 되어 지역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단다.


주암정이 있는 마을인 웅창은 나라에서 관리하던 곡식창고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인천 채씨들의 집성촌인 이웃 산양면 현리마을과 함께 유교문화가 크게 융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암정 좀 위에 우암정, 바로 건너에 경체정과 화수헌, 아래에 북파정과 녹문리 고병숙 가옥, 그 건너에 농청대, 현리로 쑥 들어가서 양파정, 큰 길 건너에는 근암서원, 안동 김씨 부훤당고택, 400년 이상된 탱자나무로 유명한 장수 황씨 고택 등 유교문화를 보여주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들이 모두 걸어서 갈만한 지근거리에 다 있다!


주암정에서 바라보면 금천이 이 웅창마을을 크게 휘돌아 흐르는 것이 보이며, 강건너에는 근품산이 나지막히 병풍처럼 둘러쳐져있어 평안한 느낌이다. 원래 금천은 주암정 바로 아래로 흘렀는데, 홍수로 물길이 바뀌고 제방을 쌓으면서 지금처럼 정자에서 좀 멀어졌다고 한다.


정자 앞에는 동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주변을 휘돌아 개울이 흐르는데 정자 옆에 난 작은 나무문을 통과하면 암벽 아래 정자가 있다.

주암정 현판이 있는 정면으로 돌아가면 기둥에 '주인이 없어도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라고 쓰여진 안내문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기둥 아래 믹스커피와 녹차, 둥글레차, 종이컵, 커피포트, 물병이 얌전히 놓여있다. 누가 이렇게 살뜰하게도 챙겨놓았을까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이 정자의 주인인 10 종손 채훈식 할아버지의 배려였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던 채할아버지는 오랜 투병을 하던 어느 날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 자신의 힘든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주암정을 잘 가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아침마다 정자마루를 쓸고 닦고 연못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가꾸고, 돌다리도 얹고, 주차장도 만드셨다. 그러자 연꽃이 피고, 새가 날아오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이에 고마움을 답하기 위해 정자 기둥에 차 한 잔 드시고 가시라는 안내문을 붙이신 것이다.


언젠가부터 이곳에서는 주암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암과 정자를 잘 보존하고 가꾸기 위해 '주암정 사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음악회도 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주암정이 지역문화를 위한 다양하면서 새로운 활동공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단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따스한 차 한 잔의 배려로 인해 주암정과 웅창마을에 대한 인상이 여느 정자가 있는 마을과 확 달라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주차장 옆의 화장실도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주암정은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각기 다른 계절의 멋을 지니고 있어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계절에 꼭 찾아가고픈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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