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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1. 2021

내 아픔을 자식에게 알리지 말라

어머님의 원칙

어머님은 상당한 원칙주의자시다.

몇 가지 삶의 원칙을 정해놓으신 것에서

한치도 어긋남 없이 살아오신 분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 몇 가지 원칙 중에는

'내 아픔을 자식에게 알리지 말라'가 있는 게 확실하다. 웬만한 걸로는 아픈 티도 안 내시는 어머님이시다.

신혼 때 있었던 일이다.

친정 다녀오면서 이바지로 싸주신 홍어를 시댁에 가져다 드렸더니, 주방에서 혼자 그걸 써시다가 어머님 손까지 저민 일이 있으셨다. 우리 왔다고 큰아가씨 부부까지 모두 모인 자리였는데, 어머님께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감추시고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함구하셨다. 우리는 한참 뒤 집에 갈 즈음에야 어머님이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계신 걸 보고 다치신 걸 알았다.

아이들 낳아 한창 키울 때는 서울과 대전으로 떨어져 살다 보니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그때 우리에게 아무 말씀도 없이 혼자서 병원 가셔서 유방 근종 수술을 하신 걸 합가한 뒤 서울 병원으로 건강검진 모시고 가서야 알았다. 서울 사실 때 혼자 대학병원 가셔서 뇌 MRI 찍으신 일도 그때서야 알았다. 작은아가씨랑 살고 계셨음에도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아가씨도 모르고 있었던 일들이다.

함께 사시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벽마다 운동 다녀오시고, 주말에는 산악회 등산을 하러 다니시다보니 소소하게 다치시는 일들이 있으셨는데 한 번도 먼저 말씀하신 적이 없다. 어느 날 팔이나 다리에 밴드를 붙이고 계신 걸 보고 "왜 그러세요?"하고 여쭤봐야 넘어져서 다치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나마도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한참 됐어야~" 하시기 일쑤였다.

요리하시다가 데이시거나 베이신 상처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먼저 알아채지 않는 한 절대 먼저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며칠 전 남편이 어머님 폰을 점검하다가(가끔 이상한 게 깔린 게 없나 살피기도 하고, 스마트워치와의 연동을 위해 폰에 설치한 앱에 저장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액정필름이 깨진 걸 발견했다. 액정필름을 갈아끼워드리면서 어쩌다 이렇게 깨졌는지 여쭤보니...

"그게 언제냐... 토요일이었등가? 저녁때 아래 필로티 가서 운동하고 온다고 나간 날 있냐 안? 그날 나가서 좀 돌다가 넘어져서 깨졌재. 폰 안 다치게 할라고 최대한 했다만 이라고 됐네."


"어떻게 넘어지셨길래요?"

"개구리처럼 이렇게 쫘악~~~~~

두 손 두 다리 다 펼치면서 넘어졌지야."

"예에? 그럼 된통 넘어지신 건데 괜찮으세요?"

"약 바르고 루민이한테 밴드 좀 갖다 달라고 해서 밴드도 붙이고 했는디, 손바닥은 밴드 붙잉께 영 통풍이 안 돼서 그냥 떼어부렀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야."

"어디 좀 봐요."

하고 어머님 손을 보니, 양쪽 손바닥에 꽤 큰 상처 자국이 있었다. 딱지가 까맣게 올라와 있는 부위가 생각보다 컸다.

"엄청 아프셨을 텐데 그냥 계셨어요? "

"마데카솔 발랐당께~"

"아이구 참, 마데카솔이 만병통치도 아니고 그것만 바른다고 될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도 손바닥은 좀 낫다. 무릎이 더 하재."

"어디요? 좀 보여주세요."

바짓가랑이를 걷고 보여주신 왼쪽 무릎엔 그야말로 큰 상처가 나있었다. 손바닥은 댈 것도 아니었다. 놀라서 약상자 들고 와, 남편이 소독하고 후시딘 바른 뒤 무릎 상처를 덮을 커다란 밴드를 찾아다 내가 붙여드렸다. 오른쪽 무릎도 덜하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치셔서 거기도 같이.

상처부위가 밴드만 붙이면 바로 떼어지는 위치라 반창고로 다시 한번 밴드 주변을 붙여서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지난 여름, 남편이 지리산 계곡에 갔다가 넘어져서 다친 부위랑 비슷한 곳이어서 그때 쓰던 밴드와 반창고가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아이고~ 머니, 제발 어디 다치셨음 다쳤다고 말씀 좀 하세요. 입 다물고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이거 그냥 두면 오래 가요~~."

(남편은 어머님께 가끔 '할머니'라고 부르며 못마땅한 기색을 표현하곤 한다)

"아따, 마데카솔 발랐당께 그라네. 이깟거 약 바르면 되재 뭐하러 니들한테까지 말할 것이냐."

"어머님 연세가 있으신데, 이런 거 그냥 두시면 안 돼요. 상처가 곪을 수도 있구요. 얼른 말씀해주시지... 혼자 얼마나 아프셨어요? 매일 운동 다니시니, 이렇게 크게 다치신 줄 몰랐네요."

"내가 넘어져서 다친 게 어디 한두 번이냐?"

"예전보다 자주 넘어지시잖아요. 지난번에는 새벽에 화장실 가시다가 문에 부딪쳐서 얼굴이랑 팔을 다치신 적도 있으시고... 그래도 이번엔 아래층 필로티에서 넘어지셨기 망정이지, 멀리로 운동가셨다가 그렇게 다치셨음 어쩔 뻔 했어요?"

집에 있는 약과 밴드로 치료하실 수 있을 정도여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으나, 넘어져 다치시는 강도와 빈도가 점점 높아져서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운동 나가시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남편이 강구한 방책이 새벽에 어머님 운동 나가신 동안 계신 위치를 실시간으로 내 폰에 자동 전송해주는 서비스를 어머님 폰에 심어두었다. 5시 20분~7시 2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어머님 계신 위치가 위성지도 링크와 함께 날아온다. 매일 어머님을 따라다닐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계신 곳을 알고 있으면 혹시 뭔 일 생기더래도 좀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식들 걱정할까 봐 다치신 걸 감추는 어머님 마음은 알지만 이제는 좀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몰래 숨기신 상처가 오래오래 어머님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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