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Nov 24. 2022

빙신이다 빙신!

건망증으로 홀랑 태운 솥 잘 닦는 법

화요일은 내가 무척 바쁜 날이다.

일이 많아 점심 때 어머님 식사를 잘 못 챙겨드릴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딸이 식사거리를 만들어 일하고 있는 내 컴책상으로 갖다주기도 하는데, 그저께는 어머님께서 점심으로 먹자고 고구마를 삶으셨다.


몇 년 전 재활용하는 날, 누군가가 멀쩡한 찜기를 버렸다고 하시며 어머님께서 주워오신 솥에 고구마를 올리고 찌면 세상 맛있게 고구마가 삶아진다. 이 좋은 솥을  왜 버렸을까? 고구마를 먹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런데 분명 어머님께서 고구마를 꺼내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선가 탄내가 솔솔 나기 시작하는 거다. 뉘집에서 뭘 태우나보다~ 하면서 난 나대로 내 일에 집중(수업관련 책을 부지런히 읽던 중이었다)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탄내가 심상치 않았다.


'어떤 집인지 제대로 태우네~ 괜찮으려나?'


그때,

주방에서 어머님께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구마 따뜻할 때 먹자! 빨랑 오니라~"


"네~"

하고 달려가니...


아뿔싸!

탄내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집 가스렌지 위에 놓인 고구마 찜기였다. 어머님께서 고구마를 꺼내신 뒤로 깜빡하고 불을 안 끄셨던 모양이다. 찜기 바닥이 아주 시커멓게 타버렸다.


"에고고, 아까맨치만 해도 암상토 않든만 언제 이라고 홀랑 타부렀다냐?"


"세상에~ 저는 남의 집에서 나는 탄내인 줄 알았더니 우리집이었네요. 환기 좀 시켜야겠어요."


하고 창문을 열러 베란다에 가보니 안방 앞, 거실 앞과 옆베란다에 연기가 제법 뿌옇게 고여 있었다! 집안에 딸까지 여자 셋이 있었는데도, 가스렌지 위에 올려진 솥이 까맣게 타서 집안에 연기가 가득 차도록 몰랐다니...


까맣게 탄 솥에 식초를 부어두고,

고구마를 드시면서 어머님 하시는 말씀.


"나가 옛날에는 옆집이서 태워도 뭐 태우는지 딱딱 맞춰서 불 끄러 댕겼는디, 코로나 걸린 뒤로는 어째 냄시가 잘 안 맡아진다 싶든만 우리집에서 나는 냄시도 못 맡냐. 개코보다 더 냄시를 잘 맡았는디~"


"코로나 후유증이 오래 가시네요. 저도 한 달 정도는 못 맡았어도 그 뒤론 괜찮아졌는데."


점심때부터 하루종일 문 열어두고 환기시켰건만 저녁까지도 집안에서 연기내가 조금씩 맡아졌다. 학교 끝나고 학원 가기 전에 저녁 먹으러 집에 들른 아들이 들어오자 마자 그런다.


"엄마, 뭐 태우셨어요? 탄내 쩔어요!"


"환기 계속 시켰는데도 나냐?"


"그럼요, 집에 문 열고 들어온순간 바로 나던데요."


"아이구~ 우리 손주는 금방 아는구나. 할머니는 인자 빙신이다 빙신이여~ 가스불 안 끈지도 모르고, 집안에 연갈내가 가득 차서 있는디 하나도 못 맡고~."


상실감 가득한 어머님 말씀을 듣자니,


"에이~ 그건 아니죠. 젊어도 깜빡깜빡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면서 내가 아는 마을사람 이야길 들려드렸다.

지금은 다른 동네로 이사가셨지만, 한때 동네 이웃이었던 한 지인은 남편과 함께 미국에 유학가서 아이들을 낳아서 키울 때까지 꽤 오래 미국생활을 하셨다. 그분은 머리가 좋기로는 서울대 박사인 남편보다 더 좋았는데, 상당히 놀라운 반전매력이 있었다. 바로 깜빡깜빡 건망증!


하루는 가스렌지에 된장찌개를 올려두고는 아무 생각없이 아이들과 놀이터에 놀러나가셨는데,  아이들과 무아지경으로 한참 재밌게 놀다보니 싸이렌이 울리며 911 소방차가 달려와서는 연기나는 아파트에 물을 뿌리더란다.


'어, 저기 우리 아파트인데. 어느 집에 불난 거야?"

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이라며 아이들 손잡고 불 끄는 거 구경하고 있다 보니, 옆에 있던 아이가 그러더란다.


"엄마, 저기 연기 나는 집  우리집 아니야?"


띠용~~~, 그랬다!

시꺼먼 연기가 몽실몽실 뿜어져 나오는 그 집은 자신의 집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동네 챙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다녔는데, 미국 떠나오기 전에 똑같은 일이 한 번 더 생겼단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집을 태워먹은 아줌씨다 보니, 아마 자신이 떠나온 미쿡 동네에선 정신나간 한국여자로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거라고~


"어머님~ 젊어도 그렇게 잘 잊어버리고 집에 두 번이나 불 낸 사람이 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셔용~^^"   



* 태운 솥 닦는 법 *

뜨거운 솥 안에 식초를 잘 둘러놓고 뚜껑을 덮는다.

(식초는 솥의 태운 면을 적시고 바닥이 살짝 잠길 정도)

30분 가량 뒤에 철수세미로 빡빡 닦는다. 끝!


태워먹은 찜기는 어머님께서 빡빡 닦으셔서 요렇게 반짝반짝 빛이 난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