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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Feb 08. 2022

쌀을 씻으며

새벽 단상

동그란 나무국자로

양을 가늠해

쌀함지박에 붓고

물을 붓는다


쌀 위에

찰랑찰랑 채운 물

수채구멍에 쪼로록 따르고


서걱 쓱 사각 싹

손을 놀려 쌀을 비비며

태어나 한 벗도 씻지 않은

묵은 때를 벗긴다


하얗게 하얗게

때가 우러나오는 동안

머리속에서 희부윰하게

떠오르는 생각들


오늘 아침은

시이모님이 영광에서 보내주신

민어를 밀가루 묻혀서 튀기고,

입 짧은 남편이 시어버렸다고

찡그리던 김치에 돼지고기

뭉텅뭉텅 썰어넣어

김치찌개 만들어야겠구나


주말에 다녀온 곳들

여흥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기록을 남겨야지

아직도 눈에 삼삼한

신정호와 옥정호를

떠올려 본다


새벽에 창문을 열어보니

날이 좀 푸근해졌던데

그곳에 내린 눈은

오늘쯤 녹으려나


아직 밝지도 않은 하루를

미리 땡겨서 짐작하다가

화들짝

쌀 씻던 손을 멈추고

다시 물을 부어 헹군다


우유처럼 찐한

첫 목욕물은

시래기국 해먹게

따로 국솥에 받아두고


요리 좀 하는 이는

첫 쌀뜨물은 버리고

두번째 쌀뜨물을 쓰라는데


여섯 살부터 해온

오랜 습관은 쉬이

고쳐지지 않는다


하얀 땟국물이

점차 맑아지면 이제

솥에 안칠 시간


압력밥솥 뚜껑 열고

개운하게 목욕재계한

쌀들을 소복소복

손에 담아 옮긴다


하얀 눈 껌뻑대며

솥안에 가지런히 누운

녀석들


맑은 물이불

찰랑하니 덮어준 뒤

뚜껑 닫고 있자니

밥솥 안에서 한동안

재잘재잘 시끄럽다


여기가 어딘데

이리 깜깜해?

낸들 아니?

그냥 자!


이윽고

소란은 멈추고

조용해진다


들판 위를 가로지르던 바람

머리 위에서 내리 쬐던 햇빛

간간히 내리던 차가운 비

허공 위를 맴돌며 재잘대던 새소리

맑은 밤하늘 위에 고요히 빛나던

달빛 별빛


마지막 꿈에서

만나고 있나보다


그럼...

애들아

잘 자.


*사진 출처 : 글그램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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