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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Feb 16. 2024

돼지고기 두 근이 전한 사랑

어머님께서는 80 가까운 생을 살아오시며, 결혼한 뒤 시댁에서 받아본 유일한 생일선물이 '돼지고기 두 근'이라고 한다.

때는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치르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영암 월출산이 보이는 청계마을에 사시던 시할아버지, 시할머니께서는 당시 서울 상계동에 살고 계셨다.


80년대 90년대에 옷 좀 사셨던 분이라면 아마도 '사반나' 라는 의류회사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한때는 삼성의 제일모직과 제법 삐까삐까 경쟁하며 잘 나가던 회사였다고 한다. '사반나'는 시할아버지의 작은아버지 집안에서 운영하는 업체였고, 막내아들은 사장의 친인척이라는 후광으로 그 회사에서 꽤 높은 자리에 계셨던 듯하다.


시할아버지는 그 옛날에도 키가 180cm가 넘는 잘생긴 훈남이었는데, 이 축복유전자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자식이 막내아들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싹싹한 말투로 사람들의 호의를 단박에 이끌어내던 막내아들은 착실하게 돈을 모아서 자신이 사는 집 외에 상계동에 집을 한 채 사두었는데, 그 집의 관리를 위해 두 분이 서울에 올라와 사시게 된 것이다.


그때 어머님은 양재동에 사셨는데, 어머님 당신도 직장 다니랴 아이 셋 키우랴 살림까지 혼자서 해내느라 깜빡 잊고 지나치기 일쑤였던 생일을 시할아버지께서 기억하시곤 말죽거리 시장에 들러 돼지고기 두 근을 떼어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가져오셨단다.


"오늘이 니 생일이지야? 아나~ 이걸로 국이나 끓여먹거라."


하시며 주신 돼지고기 두 근이 어머님이 시댁에서 받아본 유일한 생일선물로 기억에 저장되었다.


시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이셨지만 장남노릇을 하신 적이 거의 없고,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 강남으로 이사를 감행할 정도로 겉으로는 교육열이 높았으나, 정작 자식의 교육에는 실질적인 도움을 하나도 안 주셨던 분이었다.


남편을 비롯한 삼남매의 중고등학교 납부금을 대고, 하루에 6개의 도시락을 싸며 학교에 보내는 일은 오로지 어머님의 몫이었다. 심지어 남편이 대학에 입학할 때도 어머님이 시아버님과 담판을 하신 끝에 겨우 등록금 절반을 받아내신 게 유일하게 자식들 교육에 보탠 돈이었다고.


이러니 마누라 생일까지 챙기실 곰살맞은 분은 더더욱 아니었음이 자명한 사실. 무심한 남편 대신 다정다감한 시아버지께서 며느리의 생일을 챙겨주셨으니 어머님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감사한 생일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일수록 그 사랑을 더 잘 표현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어머님은 결혼하시고 시댁에서 받아본 유일한 생일선물이 시할아버지가 끊어다 주신 돼지고기 두 근이 전부였건만, 며느리인 내 생일 때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생일상을 직접 차려주시고 따로 선물과 금일봉까지 챙기신다.


올해로 25년째 결혼생활에서 작년까지 24년간 어머님이 내 생일을 챙기지 못하신 날은 딱 한 번, 10여년 전 가을에 친구분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신 적이 있는데, 마침 그 무렵이 내 생일이었다.


여행 가시기 전에도, 여행 중에도, 여행 다녀오셔서도 내 생일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어찌나 하시는지 내가 다 죄송할 정도였다. 그때도 생일상만 못 차려주셨을 뿐이지, 생일선물을 엄청 신경써서 해주셨는데 말이다.


사랑은 많이 받아서만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주고픈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게 사랑이기도 하다.


어쩌면 40년 전 시할아버지께서 문득 맏며느리의 생일날을 떠올리시고, 서울 북쪽끝 상계동에서 서울 남쪽끝 양재동까지 찾아오셔서는 돼기고기 두 근을 생일선물로 주신 게 넘치는 사랑을 퍼올려준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된 게 아닌가 한다.


어머님이 며느리인 내 생일을 25년째 꾸준히 챙겨주시게 된 사랑의 마중물.




*  사반나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1992년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는 월잡지 <멋>에 사반나 디자이너의 인터뷰가 보여서 올려봅니다.


오늘 올린 고부만사성 글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그런데 기사 보다 보면 서태지, 황영조, 이찬진(한글과 컴퓨터 사장) 등 유명인물들 인터뷰까지 나와서 읽어볼 만해요^^


https://naver.me/5GhYjy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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