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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12. 2020

폐사지에서

보령 성주사지

화마로 불태워진
고적한 절터에
소리도 없이 내리는 비

거 누구요?
여기엔 왠 일이슈?
정면을 향해
부릅 뜬 눈
꾹 다문 입술
석계단 돌사자들 머리 위에도
착하다 착하다 고운 비 내리고

우산처럼 받치고 선
층층이 탑신들 아래엔
옹기종기 피어난 이끼들이
함초롬한 잠에 빠져있다

오랜 가뭄으로
목말랐던 석불도
문대져 사라진 입에
살짜기 빗물을 머금고

지붕 이고 우뚝 선
남포오석 탑비 아래 거북은
반쪽 남은 얼굴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를 살랑이며
씨익 웃음 짓는다

속세 인간들
힘든 사연 들어주느라
오른쪽 귀는 사라지고
숱한 발원들 부처님께 싹싹 비느라
두 손도 사라진 석불 입상

그 아래
누군가 애달픈 기원을 담아
두고 간 막걸리 병 위에도
빗물은 눈물처럼
하염없이 떨어지는데

천 년 세월 끄떡 없는
돌담장 너머
노랗게 불 밝힌 은행나무

그 위를 날아가며 우짖는
산꿩 울음소리만
길게 울려퍼지는
어느 가을 날.


* 지난 번에 올린 글이 조회수 1000회를 돌파하였다고 떠서 기념으로 그날 폐사지를 거닐며 들었던 생각을 시로 풀어낸 글을 올립니다^^


https://brunch.co.kr/@malgmi7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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