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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성화 Aug 01. 2022

용미포 옛집

2. 서핑

 아직 어스름한 새벽. 세은은 3층 집의 맨 윗방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이, 엄마."


 모니터에 나희의 얼굴이 나타났다. 뻣뻣한 목을 주무르던 세은은 자연스레 손을 움직여 화면 앞에 흔들었다. 뉴질랜드 시간으로 아침 8시, 한국 시간으로 새벽 5시. 매일 아침 딸과의 통화는 하루를 깨우는 일상이었다.


 딸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나면 세은의 하루는 반복되었다. 아침 대용으로 착즙 주스를 마시며 밤새 있었던 전 세계 뉴스를 훑고, 주식 시장을 살폈다. 점심은 늘 홈쇼핑으로 주문한 익숙한 음식을 먹었고, 커피 한 잔으로 잠을 몰아냈다. 각종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다 보면 금방 오후 4시였다.


 세은은 오랜 시간 붙들고 있던 컴퓨터를 종료했다. 뻐근한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책상 맞은편의 통유리창 앞에 섰다. 남향과 서향으로 트인 창은 용미포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담아냈다. 세은이 집을 건축할 때부터 신경 쓴 부분이었다. 용미포의 집들은 대부분 단층이었기에 세은의 3층집은 막힘없이 풍광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용미포의 푸른 바다가 연신 파도를 쏟아내고 있었다. 서핑하기에 좋은 파도였다. 작은 인형처럼 보이는 서퍼들이 물 위를 가로질렀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바다와 세은의 집 사이에 위치한 옛집이 보였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아직도 철거가 안 끝났나?"


 세은이 집을 완공한 작년 봄 이후로 용미포 1리에서 공사 소리가 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세은은 옛집 공사를 며칠 째 지켜보고 있었다.


 "진서, 공진서."


 세은이 옛집 주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제 마을길을 지나다 인사를 나눈 진서는 서른 셋이라고 했다.


 서른 셋이라는 나이를 떠올리자 세은의 눈가가 붉어졌다. 세은은 촉촉하게 젖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유리창에 어린 얼굴과 마주하자 냉정히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현실을 살아내려면 심장에 겹겹이 장벽을 둘러야만 했다.


 "안녕. 다녀올게."


 세은은 1층 거실장 위에 놓인 액자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현관을 나섰다. 들릴 리 없는 희미한 대답이 자꾸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마을길을 차로 천천히 달리던 세은은 옛집 앞에 멈췄다. 답지 않게 충동적인 일이었다. 철거한 대문을 창 너머로 바라보던 세은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인사나 할까. 구경도 할 겸."


 휑한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다. 집을 둘러싼 식물들을 걷어내니 전체적으로 환하게 트여 보였다. 지나다닐 때마다 느꼈던 스산한 분위기도 걷혀 있었다.


 인부들이 연달아 집안을 오가며 물건을 옮겼다. 진서는 인부와 커다란 의자의 앞뒤를 나눠 들고 툇마루를 내려오고 있었다. 흔들의자처럼 보였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군데군데 깨져 있어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세은은 이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촬영한다는 얘기는 어제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프레임에 걸릴 까봐 걸음을 망설였다.


 이준이 들어가도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세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서에게 다가갔다.


 진서는 방진 마스크에 안전모까지 쓰고 있었다. 지쳤을 법한 시간인데도 눈가에 웃음을 매단 채 흔들의자를 마당 한쪽에 내려놓았다.


 "언니!"


 세은을 발견한 진서가 손을 흔들었다. 보안경 너머의 눈빛이 활기를 띠었다.


 "오셨어요? 저 지금 꼴이 엉망이죠? 먼지를 엄청 뒤집어 썼어요."


 진서가 보안경과 마스크를 벗으며 싱긋 웃었다. 안전모 아래로 땀에 섞인 머리카락이 귓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괜찮아요. 보기 좋아. 서핑가는 길에 들렸어요. 잘 되고 있나 싶어서."


 "서핑 가세요? 저도 배워보고 싶은데 아직은 엄두가 안 나네요. 집이 엉망이라. 안에 별 거 없는 줄 알았는데 뭐가 끊임없이 나와요."


 "천천히 해요. 이제 용미포 사람인 걸."


 진서는 용미포 사람이라는 말의 어감이 좋아 속에 새겨 두었다.


 "진서야."


 툇마루에 선 작업 반장이 진서를 불렀다. 진서는 팔을 머리 위로 뻗어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돌아보고 있을게, 다녀와요."


 "금방 갔다 올게요."


 진서가 환히 웃어 보이고 마스크를 올려 쓰며 빠른 걸음으로 툇마루로 향했다. 진서를 촬영중인 이준의 카메라도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갔다. 세은은 멀리서 반장님과 가벼운 목례를 주고받았다.


 "진서야. 어떻게 할래? 서까래랑 대들보는 튼튼한데."


 작업 반장님은 진서와 쿵짝이 잘 맞았다. 반장님이 알고 보니 엄마의 초등학교 동창분이라 급작스레 친해진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일하는 손발이 잘 맞았다.


 "멋지네요. 노출하는 편이 좋겠어요."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을 둘러본 진서는 감탄했다. 오래된 나무들이 용미포에서의 삶을 지켜줄 것 같은 포근함을 품고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알아보니까 그라인더로 갈아야 한다고 하던데요."


 "그렇지. 그 다음에 마감재 입히고."


 "수성 스테인 칠하려고요. 사람한테 해롭지 않은 걸로요."


 "나무에 쌓인 때를 다 벗겨낼 필요는 없어. 세월이 쌓인 때가 보호하는 나무는 쉽게 썩지 않거든. 다른 칠보다 유익하지."


 작업 반장님의 말을 듣고 진서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나무가 내뿜는 포근함이 세월 쌓인 때에서 나온 걸까? 꼼꼼하게 서까래를 손볼 계획이었는데 눈에 띄게 거슬리는 부분에만 손을 대기로 했다.


 "천장 보수는 해야 돼. 흙이나 시멘트로."


 작업 반장님이 천장 곳곳을 가리켰다.


 "흙으로 할래요. 시멘트 바르기보다 흙 바르기 해보고 싶었어요. 천장 보수하면서 목은 좀 아프겠네요. 으하하."


 "천장도 하얗게 할 거면 백시멘트까지 발라야 하니까 목이 아프긴 아프지. 무리하지는 말고."


 작업 반장님이 허허 웃었다. 촬영하는 겸 일손을 돕겠다는 진서에게 얼굴 한 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다 된다. 불가능은 없는 분이었다. 다치지 말고 조심하라는 잔소리는 심심찮게 하셨지만.


 "기다리는 분이 3층집 손님이네."


 "세은 언니 아세요, 반장님?"


 "저 집도 내가 손봤지."


 "오~ 반장님."


 "이 바닥에서 이 정도야. 가서 일 봐."


 "옙."


 진서가 장난기 가득 담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세은에게 달려갔다.


 세은은 망가진 흔들의자를 쓰다듬고 있었다. 세은의 옆에 서 진서가 찌뿌둥한 허리를 좌우로 번갈아 늘였다.


 "피곤하죠?"


 집 짓는 일은 충분히 경험한 세은이었다. 다 맡겨 둔다고 해도 당시에는 온 신경이 집에 쏠려 있었다. 하물며 진서는 직접 나서고 있으니 피로도가 더 높을 것이었다.


 "이 정도로 일이 많을 줄은 몰랐어요."


 진서가 얼굴에 걸친 안전장비들을 벗었다. 온통 먼지와 땀에 절어 있는데도 생기가 넘쳤다.


 "옛집에서 나온 거 다 처분하려고 하는데 이건 남기려고요. 그나마 상태가 양호해요. 적어도 20년은 넘었겠지만."


 진서가 흔들의자의 등받이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밀었다. 팔걸이 없는 흔들의자가 편안히 앞뒤로 흔들렸다.


 "보기보다 멀쩡하네요. 호두나무, 좋은 목재고. 먼지 털어내고 조금 손 보면 더 볼 만 하겠어요."


 세은의 견해에 진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나무가 호두나무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예전에 배웠어요. 나무를 잘 아는 사람한테."


 세은의 희미한 웃음에 왠지 슬픔이 담긴 듯했다. 진서는 눈치껏 깊은 질문을 삼갔다.


 "반질반질하게 닦고 수리해서 새 것처럼 만들어 봐야겠어요."


 진서가 씩씩하게 말하는데 담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풀썩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야옹."


 짧게 울어 존재를 과시한 검은 고양이가 진서에게로 다가오더니 탐색하듯 주변을 기웃거렸다.


 "길고양이인가 본데요?"


 진서가 조금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고양이를 살폈다.


 "이 동네를 배회하는 고양이라고 할까? 이 집, 저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고양이예요. 우리집에도 드물게 찾아오고."


 세은이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검은 고양이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래요? 얘는 발만 하얘서 흰 양말 신은 것 같아요."


 검은 고양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무딘 편인지 진서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잠시 움찔한 진서는 가만히 다리를 내어줬다. 갈색 바지에 까만 털이 묻어났다.


 "이상하네요. 저 원래 고양이 무서워하는데 얘는 괜찮아요."


 "요즘 애들이 뭐라고 하더라? 고양이가 간택했다고 하던가? 진서씨가 집사 되겠는데요."


 "집사요?"


 진서의 놀란 목소리에 아랑곳 않고 검은 고양이는 흔들의자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당돌한 고양이네?"


 마주한 시선이 조금 높아진 고양이를 진서는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검은색 몸에 네 개의 다리 모두 발에서 발목 부근 까지만 하얬다. 학창시절 검은 스타킹 위에 흰 양말을 신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나를 찜했다는 건가? 그럼 내가 너를 키워야 한다고?"


 진서가 연두색과 노란색이 섞인 고양이의 오묘한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야옹."


 "얘 좀 봐라. 말을 알아듣나? 그럼 네 이름은 이제부터 흰 양말이야. 어때?"


 흰 양말이 만족한 듯 짧게 울었다.


 "대신 집 안에는 들어오면 안 돼. 한동안 공사할 거라서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다니고."


 진서가 고양이를 타일렀다. 흰 양말은 그새 흔들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양이 울음소리 번역해 주는 어플도 있으니까, 한 번 설치해 봐요."


 세은의 눈가에 웃음 띤 옅은 주름이 맺혀 있었다.


 "그런 게 있어요? 혹시 고양이 키우세요?"


 "나는 아니고 딸이 키우는데 알려줬어요."


 "아, 따님이."


 고양이는 원래 제 자리인 마냥 흔들의자에 편안히 누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진서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고양이의 등을 검지로 살짝 쓰다듬었다. 진서의 눈가가 움찔했다. 처음 만져보는 고양이의 털은 뻣뻣한 듯 부드러웠다. 무엇보다도 놀랄 만큼 따뜻했다. 생명의 온기가 온전히 손가락을 타고 흘러 들었다.


 진서를 바라보는 세은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영상을 담고 있던 이준은 깊어진 세은의 눈동자를 읽었다. 바라보는 사람까지 먹먹하게 하던 세은의 눈빛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멀리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바람에 실려 용미포 옛집에 닿았다.


 "진서씨 서른 셋이랬죠?"


 "네. 재밌는 숫자죠? 같은 숫자 두 개를 나란히 쓰면 귀여워요. 전 옛날부터 겹치는 숫자가 좋더라고요. 11살 때도, 22살 때도, 33살인 지금도요."


 "그런가요?"


 세은이 머릿속으로 숫자를 그려보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세은의 서른 셋과 진서의 서른 셋은 다른 것이다. 세은은 또렷하게 새겨진 그 나이를 뿌연 안개로 희미하게 가려버렸기에.


 "좋은 나이였군요. 새삼 어리기도 하고. 마무리 잘 해요. 난 가볼게요."


 세은은 진서의 배웅을 받으며 옛집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용미포구였다.


 서핑 준비를 마친 세은은 보드를 들고 모래사장에 섰다. 최근에 용미포를 소개한 방송 때문인지 사람이 늘었다. 조용히 바다를 즐길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자연을 언제까지 독점할 수는 없었다.


 신발을 벗고 걸으니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파고들었다. 서핑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하루 종일 햇살에 달궈진 바닷물은 미적지근했다. 발목에서 철썩이던 파도는 종아리를 거쳐 무릎, 허벅지에 닿았다. 엉덩이에 바닷물이 닿자 세은은 훌쩍 보드 위로 올라 엎드렸다. 패들링을 하며 손으로 바닷물을 갈랐다.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밀어내고 있으면 잠시나마 잡을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은 기분이 들었다.


 파도를 기다린다. 쉴 틈 없이 치는 파도를 기다린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기다려야 한다. 서핑하기 좋은 파도가 올 때까지.


 한 파도에 한 사람 씩, 먼저 준비하고 있던 서퍼들이 차례대로 파도를 탔다.


 "서른 셋."


 서핑 보드에 뉘인 세은의 몸이 파도에 출렁였다.


 서른 셋에 세은은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을 닮은 아이가 세은의 목을 껴안고 울 때 세은은 아이를 단단히 껴안았다. 눈물도, 슬픔도, 막막함도 전부 삼켜버렸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바쁘게 보내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웠다.


 돈 들어갈 곳이 가득했다. 생활비, 공과금, 할부가 남은 차 한 대 등. 사회 경험도 없던 그때 목표는 하나였다. 돈을 벌어야했다. 악착같이 버티면서.


 전세금을 빼서 작은 집으로 옮기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자그마한 가게를 얻었다. 당장 할 줄 아는 건 요리뿐이라 작은 분식집을 열었다. 처음부터 잘 된 건 아니지만 알음알음 입소문이 났다. 멀리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이어지자 가맹점 문의가 심심찮게 들어왔다. 프랜차이즈 사업도 고려했지만 다른 방향을 택했다. 제품 개발을 통해 홈쇼핑에 진출한 것이다. 매장에서 파는 맛과 홈쇼핑에서만 파는 신메뉴를 묶어 팔아서 호응이 높았다. 돈이 바닷물처럼 밀려 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회사는 건강 문제로 2년전에 대기업에 매각했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몇 줄로 요약되는 지난날이지만 간절함이 담긴 피말리는 시간이었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자본 일이 없었고, 툭하면 불면증에 시달렸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책임감에 의해서.


 노력 이상의 부분은 하늘에 있는 남편의 도움이라고 여겼다. 회사를 판 후 매각 대금의 절반을 췌장암 환자를 위해 기부했다. 남편과 같은 병을 앓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손 쓸 수 없던 남편과 달리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으므로.


 딸이 원하던 뉴질랜드 유학을 보내던 날, 목적지 없이 차를 무작정 서쪽으로 달렸다. 그 끝에 멈춘 곳이 용미포 해안이었다. 용미포 해안은 모래사장을 거닐던 세은을 추억의 한 순간으로 데려갔다.


 관광객은 없고, 현지인만 고즈넉하게 서핑을 즐기던 발리의 작은 해변가. 용미포 앞바다는 그날의 발리와 닮아 있었다. 남편과 처음으로 서핑을 배웠던 그곳과. 그리운 냄새로 밀려드는 바다내음에 묵혀 둔 감정을 토해냈다. 꺽꺽 대는 괴상한 소리는 용미포 파도소리가 감춰주었다. 그래서 세은은 연고도 없는 용미포에 정착했다. 파도가 눈물을 달래줘서.


 "정신차리자."


 보드에 엎드린 세은에게 연달아 파도가 밀려왔다. 바다는 넓었고 세은이 흘린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것은 희석되어 하나의 물로 흘렀다.


 마침내 적당한 파도가 밀려오고, 세은이 보드 위로 일어섰다. 테이크 오프. 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버티며 보드 위에 섰다. 제대로 보드 위에 올라섰다는 균형감이 느껴졌다. 세은을 태운 보드가 우아하게 바다 위를 미끄러졌다. 금빛으로 물든 바닷물이 넘실넘실 춤췄고 세은은 반복해서 파도를 탔다.


 어둠이 바다를 집어 삼키기 전에 세은은 차로 돌아왔다. 주차해 둔 지척에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용미포 정자에서 걸쭉한 웃음소리가 나더니 복자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 가더라~"


 여럿이 두드리는 둔탁한 허벅 장단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궜다. 복자 할머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세은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수건은 간혹 세은의 얼굴도 쓸었다.


 지금 당장, 가까이에서 편히 만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떠오르지 않았다. 복자 할머니처럼 편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모두 멀리, 아주 먼 곳에 있기만 했다.


 "어떻게 산 거야."


 수평선 너머로 사그라지는 짙은 노을이 붉은 세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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