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할머니는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옛날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보이는,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조금 부러웠다. 호들갑이 아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반응도 좋았다. 그래서 내가 추억하는 일들을 꾸밈없이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하기도 전에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봉사단에 지원을 나간 건 하루였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도 단 하루일뿐이었다. 그와 다시 만난 건 일 년 뒤, 친구의 결혼식장에서였다.
나는 친구의 들러리를 맡기로 했기 때문에 결혼식장에 일찍 도착했다. 친구의 결혼식은 처음이었고, 들러리라는 역할도 처음. 나는 친구가 맞이할 인생의 소중한 순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은 긴장한 채였다. 혹시라도 늦을까봐 얼마나 서둘렀던지 신부는 아직 결혼식장에 도착하지도 않았고, 친구가 결혼식을 치를 홀에서는 앞선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한숨 돌리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친구가 거닐 버진로드를 미리 살펴보고 옆의 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도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또 다른 홀로 걸음을 옮겼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지만 왠지 불편했다. 연주는 부드러웠고, 유려했지만 다가서고 싶은 마음과 왠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평소와 달리 이질적으로 들리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갔다.
그곳에서도 결혼식이 준비 중이었다. 불이 꺼진 홀에 피아노가 놓인 곳에만 조명이 켜져 있었고, 그 주변에 몇 사람이 몰려 있었다. 아마 미리 축가를 연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결혼식장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피아노 소리만 귀에 꽂혀 홀 입구에서 기웃거렸다.
심장이 푸른빛으로 두근거렸다.
그였다.
일 년 전 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 모양이 살짝 바뀐 검은 테의 안경. 조명 아래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사람은 그였다. 나는 다시 한껏 긴장했다. 그는 노래는 부르지 않고 피아노 반주만 맡은 것 같았다. 결혼식에서 쓰일 법한 익숙한 반주와 그의 곁에선 친구들의 노래가 몇 번 반복됐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여전히 내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
잠시 멈추었던 피아노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홀의 입구에 서서 나는 다른 소리는 모두 지워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나와 그, 그의 피아노 소리만 남았다. 나는 그의 잔잔한 연주에서 푸른빛을 느꼈다. 나의 입 꼬리가 음표를 따라 올라갔다.
그가 연주를 멈추자 알아들을 수 없게 섞인 사람들의 말소리가 그제야 들려왔다.
그가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더니 홀의 입구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여기에 서 있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나는 그를 피할 생각이 없었지만 무척 허둥댔다.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어색할 지경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애초에 그가 인사한 번 나눈 적 없는 나를 알아보기나 할까. 모른 척 서 있어야 하나. 인사를 건네야 하나. 그가 당황하지는 않을까. 온갖 생각이 스쳤다.
불 꺼진 홀의 옅은 어둠과 밝은 조명의 경계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에서 나를 알아보는 눈치를 발견했다.
위아래로 쿵쾅대던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정리를 하기도 전에, 그는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그가 먼저 나에게 인사를 했다.
“푸른빛.”
나는 인사도 없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다. 결코 의도되지 않은, 머릿속에서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전혀 없던 말.
“네?”
뜬금없는 내 말에 놀란 듯,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망함이 밀려왔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는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정도 함께 쏟아졌다.
“푸른빛. 그쪽 연주에서 푸른빛이 나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푸스스 웃었다.
나는 그런 미소를 두 번째로 봤다. 첫 번째 웃음도, 두 번째 웃음도 모두 그가 짓는 미소였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내 머릿속으로 강렬한 푸른빛이 내리쬈다.
나는 다시 멍했다.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몽실몽실했다. 구름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헤어졌고, 나의 친구와 그의 친구의 결혼식이 모두 끝난 뒤 다시 만났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그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난 알아 버리고 말았다. 그의 푸른색이 나를 물들였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