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이야기를 듣는 할머니의 입가에는 계속 엷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나는 내게도 할머니가 있었다면 나를 향해 이렇게 미소지어주셨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시켜먹고, 계속해서 추억을 나누었다. 나는 낯선 사람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가까운 사이라, 너무 잘 아는 사이라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오히려 낯선 사람과 나누는 일이 좋았다. 아마 말을 나누고 있는 할머니가 지닌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다시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보통 수준은 넘는 실력이었다. 음악에 젬병인 내가 듣기에도 수준급이었다. 그는 내게 악기며, 새로 나온 작업 기계며, 음악과 관련한 모든 잡다한 지식과 흥미를 쏟아냈다. 특히 진행 중인 작곡 이야기를 즐겨했다.
나는 곡을 쓰는데 심취한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좋았지만, 작곡 관련 이야기는 난해했다. 안타깝게도 음악이라는 영역은 수학만큼이나, 나의 흥미와 이해도가 비례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작곡이라는 영역은 세계 7대 난제로 불리는 수학문제와 동급이었다.
음악에 대한 말을 이어가는 그의 볼이 살짝 상기될 쯤, 나는 “피아노를 쳐줄래?”하고 물었다. 그때 그의 연주는 어느 때보다 최고였으니.
그럴 때면 그는, 조금 전에 설명하던 작곡중인 곡을 연주해 보이고, 곧이어 즉흥곡을 연주해주었다. 악보도 없는 곡이 그의 머릿속을 흘러 손끝에 닿은 건반을 울리고, 그가 담긴 선율이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가 연주하는 즉흥곡을 들을 때면 마법에 걸린 마리오네트가 된 것 같았다. 마법사는 당연히 그였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좋아했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는 언제나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흘렀다.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꿈속에 잠긴 사람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영원히 내 꿈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없는 현실이 싫어, 차라리 꿈속에 머물고 싶은 나날들을 보냈다. 다시 나를 스친 진실이 소름끼치도록 아팠다.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할머니에게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펼쳐놓았다. 할머니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는 때로는 얼마 안 된 이야기를, 때로는 몇 년 전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인생의 여러 순간들과 시시콜콜한 일상의 순간들이 뒤섞인 할머니와 나의 이야기가 차례대로 교차되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시는 듯싶더니 검은 클리어 파일을 들고 피아노 앞에 가서 앉으셨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피아노 앞에 가서 섰다.
피아노 위에 바싹 마른 꽃잎이 모든 수분을 잃은 채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낯선 듯 익숙한 드라이플라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이가 내게 해준 마지막 선물이에요. 태준이가 추천한 선물이라고 하던데. 덕분에 내가 오랜만에 꽃 선물을 받았어요.”
나는 몇 달 전 그가 사갔던 꽃다발을 기억했다. 주인집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꽃을 선물하시려는데 꼭 빨간 장미여야 한다, 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처음 드린 선물이 빨간 장미였다며.
그 말을 전하는 그는 웃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더 밝은 미소였다..
주인집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빨간 장미를 한 아름 안고 꽃집을 나서던 그.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오게 될까. 머리가 하얗게 새고, 시간의 흐름이 뚜렷하게 온 몸에 새겨져 있을 때, 우리의 모습도 그럴 수 있을까.
이제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나는 드라이플라워를 보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지금껏 잔뜩 마신 차나 물 같은 모든 액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목이 턱 막힌 듯 답답했다.
할머니의 손이 펼쳐진 악보를 따라 움직였다. 테이블 위를 넘나들던 손가락이 내는 소리가 아닌 건반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을 따라 그가 남긴 노래가 흘렀다.
그가 작업을 멈춘 곳에서부터 할머니가 곡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작곡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우리의 이야기를 완성해주고 있다는 걸. 내가 한 이야기들이 선율에 녹아내리고 있다는 걸.
“이 다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음을 흥얼거렸다. 어떤 지식도 없이 그냥 내게서 흘러나오는 음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음을 건반 위로 옮겼다. 신기하게도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입에서 나온 나도 모르는 음표들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건반을 통해 울리고, 그가 남긴 악보 위에 새겨졌다.
잔잔하게 끝난 연주가 마무리 되고, 할머니는 다시 처음부터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푸른빛이 할머니의 손길을 따라 빛났다.
나는 그가 왜 할머니에게 작곡에 대한 도움을 청했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할머니의 연주에서도 희미한 푸른빛이 났다. 그것이 그의 곡을 연주하기 때문에 나는 빛인지, 원래부터 할머니의 연주가 푸른빛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실을 메우자 나는 깨달았다. 그날, 그가 나에게 비밀로 하고 가려던 곳이 어디였는지. 왜 그가 그곳에서 사고를 당했는지. 왜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에서 세상과 이별했는지.
그는 그 숲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우리만의 비밀의 숲에. 함께하려던 우리의 미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