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른이 된다
어린 시절 나는 참으로 걱정이 많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한없이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로, 걱정을 조금만 덜어냈으면 키가 더 컸으려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음의 무게는 사람마다 때마다 다른 법. 내게는 매 순간 간절하고 강렬한 마음앓이였다.
나는 여섯 살 이전까지는 엄마 아빠의 아침 출근길에 큰 외삼촌 댁에 맡겨졌다. 큰 외삼촌 댁은 조그마한 슈퍼와 식당을 같이 운영하셨는데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온종일 잘도 놀았다. 티비를 보기도, 외할머니와 셈 공부를 하기도 했으며 마실 오신 아주머니들 이야기를 들으며 방 한 켠에서 조용히 낮잠을 자기도 했다. 말 한마디 없이 얌전히 앉아 있으면 담배를 사러 오시는 단골손님들에게 100원 500원 용돈을 받기도 했는데 작은 눈치가 챙겨주는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한 살 위 오빠도 오후면 그 가게 앞에 내려졌고 저녁 무렵 부모님이 데리러 오실 때까지 함께 있었다. 외삼촌, 외숙모는 종종 원하는 과자를 선뜻 꺼내 주셨는데 과자 하나로도 시간은 행복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 조건 없는 행복은 어린이에게 염치를 앗아갔다. 어느 날 우리는 매대의 과자, 아이스크림을 고삐 풀린 듯 제멋대로 꺼내 먹었고,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겠다던 외삼촌의 진담 반 농담 반 말씀에 그제야 내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다. 허락받지 않고 마음대로 먹은 것도 걱정, 얼마나 큰돈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도 걱정이었다. 엄마가 오시면 먼저 이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시간부터 오빠와 나는 티비 광고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과자, 아이스크림 광고 하단에 상품 금액이 함께 나왔기에 우리가 먹은 것들의 광고가 나올 때면 재빠르게 적어 내렸다. 외할머니와 했던 셈 공부가 요긴하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오시자마자 버선발로 뛰어 나가 떨리는 고백을 시작했고 다행히 크게 혼나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어린이에게는 끙끙 앓던 마음도, 잘못을 인정하고 후련해지던 마음도 생생히 새겨졌다.
눈치가 빠르다는 건 누군가의 말마디, 표정과 행동을 잘 알아차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유독 어른들의 말씀을 철석같이 여겼다. 엄마의 수많은 증언이 뒷받침해 주었는데, 성당 미사 때나 성가대 연습, 기도 모임 등에 어린 나를 데려가야 할 때에도 “여기선 조용히 하는 거야.” 한 마디에 한 시간이 훌쩍 넘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켜 용돈이나 간식을 톡톡히 받았더랬다. 하지만 경험도 융통성도 부족한 어린이에게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때로는 생각보다 더 피곤한 일이었다.
일곱 살 즈음 오빠와 함께 다니던 피아노학원에서는 학원비 내는 날에 맞춰 학원비 봉투를 넣어주었는데 깜박하고 부모님께 드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도 깜박하신 채 출근하셨고, 우리는 학원 갈 시간이 되어서야 가방에 담긴 봉투를 발견했다. 항상 제때 학원비를 냈었고 심지어 피아노 선생님은 옆 동에 사시는 엄마의 친구였다. 하다 못해 엄마 퇴근 후에 말씀드려도 전혀 늦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오빠와 나는 무언가에 씌인 듯 집에 있는 잔돈은 다 그 학원비 봉투에 담기 시작했고, 각자의 용돈도, 눈치껏 벌어들인 내 500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금액은 맞게 채웠는지 모를, 잔뜩 불거진 봉투를 담아 피아노학원으로 향했다. 엄마와 선생님이 얼마나 기가 차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웃긴 어린이들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서 배움이 쌓이고 머리는 커졌다. 그리고 수많은 걱정은 옅어지기보다 되려 구체화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엄마의 곁을 떠나 어린이들만 가는 성당 미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해 첫 고해성사(천주교에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를 하게 되었다. 신부님께서는 고해성사를 앞두고 부모님 말씀 듣지 않은 것, 형제 또는 친구와 싸운 것, 거짓말을 한 것 등 어린이가 했을 법한 잘못들을 아주 길게 설명해 주시며 이참에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나는 11년도 채 되지 않은 인생을 돌아보며 수많은 잘못을 눈물로 써 내려갔고 노트 한 장을 앞뒤로 빼곡히 채운 50가지의 사소한 죄목을 만들어냈다. 고해성사 당일, 떨리는 목소리로 일, 이, 삼 번호를 매겨 갔는데 결국 중간부터는 번호 매기는 것을 제지당하고 말았다.
이토록 걱정 많던 어린이는 자라더라도 역시나 별 수 없이 걱정 많은 어른이 될 뿐이었다.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내 말과 행동을 곱씹어보고 후회할 때야 수없이 많았다. 나아가 안전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강박까지 느껴졌고, 고데기를 뽑았는지,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문을 잘 닫고 나왔는지를 다시 확인하러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자 종국에는 사진을 찍고 등교했을 정도였다.
강박은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인턴을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이 강박에 시달릴 미래를 예감했는데, 한동안 그 걱정에 극심히 우울했다. 이제 국가고시를 갓 통과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술기를 할지, 또 어떻게 감히 진단과 치료를 할지, 그 일의 막중함과 부담감에 짓눌려 버린 것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인턴이라면 누구나 느낄 감정이었지만 나는 애써 합격한 병원에 입사를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힘들었다.
의사로서의 삶을 고작 5년째 살뿐인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더 공부하고 더 경험할수록 두려워할 것이 많아지고 아주 만일의 경우까지 고려하게 된다. 더불어 병원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길고도 무거운 것으로, 일과 일상 사이의 이상적인 분리는 아직도 참 어려운 일이다.
줄곧 이어지는 걱정과 강박은 삶을 살아오는 내내 나의 불편함, 나의 약점이었고 고칠 수 있다면 고치고 싶은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걱정을 끙끙 앓다 못해 몇몇에게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것은 역시나 터무니없다는 핀잔 또는 타박이었는데, 묘한 안심이 되어 다행이면서도 그런 내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았다.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실체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걱정’은 어쩌면 다소 덜렁대고 꼼꼼치 못한 내게 이 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미리 마련해 둔 장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조금 힘들고 피곤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만에 하나의 확률로 어느 아이에게는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 또한 분명했다.
최근 또 한 번 그 선물을 받았는데, 얼마 전 병동에서 밤 당직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다 잘 회복된 한 아이가 병동을 오가다 엄마와 편의점을 가는가 싶더니 쭈뼛대며 다가와 생긋 본인이 먹을 과자를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 아이를 두고 전전긍긍한 지난밤들도, 당직의 고됨도 옅어지는 크나큰 보상이었다.
내가 평생 가겠다 선택한 의사로서의 길을 화려하게 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가 행복하게 걸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길 중간중간 고민하고 걱정하고 울적해질 때마다 이 글에서 답을 얻고 힘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기록해 둔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본디 걱정이 많게 태어난 이 약점을 다시 당당히 바라보기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무엇보다 걱정을 껴안느라 줄곧 고생이 많다고 스스로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걱정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 하지 않았을 리 없는 순간들이 모여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결국 마주하는 아이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주문처럼 기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