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른에서 교환 학생으로 한 학기 동안 공부한 조카의 유럽 생활이 끝났어요. 브레멘 근처에 사는 이모 집을 베이스캠프 삼아 여행을 떠났다 며칠 묵었다 가기를 여러 번, 아예 한국으로 간 지 벌써 반년이 지났네요. 조카가 집에 올 때마다 오누이는 달떴고, 그 달뜸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마지막 여행지마다 잊지 않고 선물을 사 왔어요. 세 차례 집에 들른 조카는 런던에서, 퀄른에서 그리고 스페인 마드리드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딸이 좋아할 만한 팔찌와 아들에겐 동전 지갑으로 큰 기쁨을 안겼어요.
사람 빈자리는 금세 표시가 난다더니 마지막으로 일주일간 묵고 간 집이 휑해요. 조카가 떠나는 날, 남매는 각자 장난감 자동차 밀 듯 누나의 짐가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소란스럽게 정류장까지 배웅했어요. 제대로 인사할 새 없이 버스가 도착했고 얼떨결에 손만 흔드는 우리에게 조카는 문이 닫힌 버스 안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동시에 떠났어요. 누나가 떠난 정류장 의자에 앉은 오누이는 이내 풀이 죽고 터벅터벅 집에 오니 딸이 언니랑 하다만 카드가 소파 위에 펼쳐진 채 그대로예요.
딸은 언니가 없다는 게 잠잘 무렵이 되어서야 실감 났는지 언니가 보고 싶다고 다시 오면 좋겠다며 찾아요. 언니가 가니까 슬프다면서요. 브레멘에서 출발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할 즈음 통화를 했어요. 화면으로 언니를 본 딸은 참던 울음을 그제야 터트려요. 언니 빨리 와.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냥 지금 다시 오면 안 되냐며 되지도 않는 떼를 부려요. 언니도 전화기 너머에서 눈물을 훔치는지 엉뚱한 화면만 계속 보이고 대답을 못해요.
페이스톡으로 얼굴 보면서 통화를 했지만 화면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흐르는 눈물은 닦아주지 못해요. 딸은 한동안 언니를 와락 껴안지도 못할 테고. 손 잡고 도란도란 걷거나 한 상에서 밥을 먹지도 카드 게임을 하자고 보채지 못하겠죠.
한국을 떠나는 날도 그랬어요. 공항에서 점심 먹을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당일 날 새벽까지 빠진 것 없이 점검하고 챙기느라 피곤했어요. 어서 비행기에 타서 끊임없이 염려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독일에선 먹기 힘들 것 같은 후루룩 먹기에도 좋은 사골국을 무의식적으로 시켰어요. 뽀얀 국물에 만 밥을 반쯤 먹었을 즈음 큰아이 친구 엄마이면서 나의 오랜 지기인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이는 친구와 통화하다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꿔줬는데 그 친구가 운다면서 엄마도 울먹여요. 울음은 이상하게 쉽게 전염되잖아요. 밥 먹다 말고 흐르는 눈물은 이별을 조금씩 실감 나게 했어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비행시간이 되었고 벌써 검색대 앞이더라고요. 공항에 배웅 온 세 명의 언니와 헤어지려던 찰나 친절하게도 아이 동반 손님에겐 줄 서지 않고 바로 통과하도록 빠른 문이 열렸어요. 곧 유럽 여행 온다며 마음 푹 놓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당황했어요. 한 언니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떨궜고요. 한국을 떠나는 건 언니들을 쉽게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제일 큰 슬픔이에요. 옆 동에 살던 언니 집에 수시로 들러 밥 달라는 것도 못 하겠죠.
시부모님께 독일에 간다고 말씀드린 날, 어머님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셨어요. 아무리 자식이지만 부모가 말릴 재간이 없다는 걸 아시고 선진국에서 살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마음을 다잡으셨어요. 늘 하시던 말씀인 너희만 잘 살면 된다고. 부모 걱정은 말라면서요. 자식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지지하면서도 슬픔은 감출 길 없으셨죠. 한국에서도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못 뵈는 거리에 살았는데 그마저 못한다고 생각하니 자식이 잘되길 바라면서도 다신 못 볼 것처럼 슬퍼하셨어요.
저를 아끼던 지인은 헤어지는 일은 ‘짧은 죽음’을 경험하는 거라고 했어요.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만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요. 거리만 극복하는 게 아니라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니까요. 죽음과 삶의 간격만큼은 아닐지라도 독일과 한국의 물리적 거리는 그만큼 멀어요. 만나고 싶을 때 간절한 열망만 있다고 쉽게 만나지 못하니 짧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희망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