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남매 키우기 #9
터널만 지났을 뿐인데 가을이다. 물론 로마에도 가을이 왔다. 바람 햇살 하늘 모두 하나 같이 가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도 뭔가 아쉽다. 로마에선 울긋불긋 단풍과 낙엽들을 만나기 어렵다. 영원의 도시 로마답게 푸른 소나무가 위용을 뽐낸다. 조경에 대한 시각 차이일까? 고대 로마부터 도로에 소나무를 심어왔기 때문일까? 골목이 좁으니 자연스럽게 인도도 좁아져 나무를 심을 공간이 없어서 일까? 21세기 로마의 도로에는 여전히 우산 모양의 소나무가 펼쳐지지만 거리를 걸으며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내 고향 대구의 집 앞에는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흐드러진다. 나무도 길도 온통 노란색이다. 괜히 은행나무 길로 걷는다. 그 길에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일부러 꼬마 아이들 곁에 서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이안이를 임신하고 홀로 한국에 들렀을 땐 초등학교 앞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먹고 배를 쓰다듬으며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아이를 낳고 남편이 시즌 투어를 시작하면서 매년 3월만이 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로마의 매 계절을 사랑하지만 가을만큼은 대구가 그립다.
로마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리면 라치오(Lazio) 주를 벗어나 아브루쪼(Abruzzo)로 접어든다. Campo felice (캄포 펠리체)에 가까워지면 그란사소 산맥 아래로 펼쳐지는 평원을 만난다. 무채색의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이 나타난다. 마치 지구가 아닌 행성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들판의 식물들도 어딘가 우주스럽다.
주말 아무런 계획이 없는 날 좋은 오후면 우린 종종 이 곳으로 달려온다. 오늘은 평야를 가로질러 처음으로 터널을 지났다. 친구네 아버지 산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터널을 하나 지났을 뿐인데 또 다른 세상이다. 그리워하던 가을이 펼쳐졌다.
얼굴이 따끔거릴 만큼 햇살이 강했다. 그래서일까? 산을 가득 채운 나무들의 색이 쨍하게 진하다. 산장으로 가기 전에 길 가운데서 친구네를 만났다. 드넓은 평원에 차를 세웠다. 작은 조랑말 두 마리를 빌렸다. 아빠들이 줄을 끌어주고 아이들은 들판 위를 달린다. 아이들이 신이나 소리를 지르자 우리가 더 행복하다.
어른들은 말을 타고 산속을 트래킹 하는 코스도 있다고 했다. 계곡을 건너 어느 날은 사슴도 만나기도 한단다. 다음에 친구들이 더 많이 오면 아빠들 엄마들 교대로 아이들을 맡고 산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 보고 싶다. 디즈니 만화의 한 장면이 떠 오른다. 왕자님 일행이 산속의 계곡에 멈추어 서서 목을 축이는 그런 장면 말이다.
평원 뒤로 펼쳐지는 산들은 모두 스키장이다. 난 추운 날은 물론 추운 스포츠는 질색이다. 그런데 가을을 보니 겨울도 보고 싶다. 이탈리아는 따로 겨울방학이 없다. 대신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이어지는 긴 휴일이 있다. 이 휴일을 제외하고 일주일 정도 학교가 쉬기도 하는데 이 주간을 스키 방학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겨울 산으로 향하기도 한다. 스키장에서는 주 단위로 캠프가 있는데 세 살부터 수업 참여가 가능하다. 마지막 수업 날에는 눈 덮인 밤의 겨울산을 아이들을 촛불을 들고 스키를 타고 내려와 부모들 품에 안긴다.
소싯적 스키장에서 살았지만 로마에 오고서 15년이 되도록 스키장 한번 못 가본 남편도 로마에 살아 눈을 볼일이 없어 눈사람이 궁금한 아들도 추운 것은 질색인 나도 이번 겨울에는 스키장 한번 가봐야겠다.
산장은 언덕에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구운 케이크에 직접 담근 잼을 올려 모카포트에 끓인 커피와 함께 먹었다. 남편은 마당 의자에 앉아서 졸고 딸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둘째는 그냥 키우는 거지 뭐…)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린다. 들판에서 풀을 먹던 소들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아빠들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산너머로 해가 넘어가자 금세 추워진다. 엄마들은 아이들 겉옷을 들고 길을 나선다. 아이들은 소에는 관심도 없다. 낙엽에 뒹굴고 난리가 났다.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 나도 뛰어들고 싶다.
실컷 놀았을 법도 한데 날은 어두워지고 공기는 차가워지는데 애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결국 두 아이를 울리고서야 차에 태울 수 있었다. 겨우 눈물을 그친 아이는 즐거웠던 하루 이야기에 금세 신이 났다. 너무 좋다고 또 오자고 몇 번이나 말한다. 그리고 아이가 말한다.
이안이도 할아버지 할머니 있잖아.
이안이 할아버지 집에는 로보트도 많잖아.
그저 즐거워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 글을 쓴 적도 있지만 이탈리아는 조부모와 아이들이 무척 돈독하다. 대다수 맞벌이다 보니 조부모의 도움이 절실하다 유치원 행사에도 어김없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한다. 손주들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함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느낌을 받는다. 등하교에도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이 많다. 문득 아이의 말을 들으니 그런 모습들을 보며 어떤 감정이었을까 싶다.
친구들 집에 식사초대나 행사 초대를 받아서 가면 항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다. 세상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렇지만 특히나 손주사랑이 유별난 이탈리아 사람들이니 그 모습에 아이는 내색하지 않아도 부러웠을까?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탈리아다. 한국은 할아버지 집이 있는 곳이고 비행기를 타고 오래 가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며칠 전 아이와 함께 예전 사진을 보는데 외할아버지를 보더니 누구냐고 묻는다. 한국에서의 휴가 동안 시댁에서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다 보니 외할아버지는 금방 잊었나 보다. 그래도 조금 서운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두 분 일 수도 있다는 개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휴가 동안 친구들을 만나느라 바쁜 우리인데 내년 3월의 한국 휴가에는 아이들과 부모님과의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 외할아버지와도 더 친해지길......
매년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담아서 로마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그리움도 기다림도 알아갈 것이다. 이번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올 때면 아이의 마음속에 눈밭의 추억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기억도 함께 담기길 바라본다.
written by_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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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개인 블로그를 통해 연재되었던 글을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