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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두 갈래의 길
시로 쓰는 육아일기
by
진아
Aug 25. 2020
두 갈래 길
집으로 돌아오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파트 사이
가로지르는 곧은길입니다.
하나는 아파트 테두리 빙
두르는 굽은길입니다.
유모차를 밀고 가던 나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곧은길의 초입으로 들어섭니다
유모차에 기대앉은 아이는
굽은길로 가자며 몸을 비틀어댑니다
어쩔 수 없이 몇 걸음쯤 뒷걸음질을 칩니다
굽은길과 곧은길의 입구는 맞닿아 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이쪽과 저쪽
이편과 저편
내 몸 방향만 바꾸면
언제고 굽은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았습니다
시계의 긴 바늘
,
채 세 칸도 움직이기 전에
같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길이었지만
언제고 곧은길로만 몸을 틀었습니다
아이의 성화에 접어든 굽은 길
방금까지 바쁘던 마음에
별안간
,
여유가 생겼습니다
배롱나무 진분홍
꽃들은 어느새
바닥 가득히 보랏빛 발자국을 남겨 두었네요
이름 모를 나무 푸른 이파리 사이로
여물지 않은
붉은
열매 주렁주렁하구요
키 작은
풀들 무성한 놀이터 뒤편에선
귀뚜라미 우는 소리 제법 우렁차게 들렸습니다
어둑어둑 해 넘어간 하늘에는
채 절반이 채워지지 않은 달 하나가
떠올라 있었습니다.
곧은길로 걸을 땐 몸도 꼿꼿이 굳는지
오로지 집의 방향으로만
그렇게 바삐 움직였더랬어요
굽은길로 가보니 몸도 이리저리 굽는지
여기저기 눈을 둬가며
그렇게 쉬엄쉬엄 움직여지더라구요
지척에 집의 그림자 나타날 때쯤
유모차 앞으로 개미 여섯 마리가
줄지어 기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개미 위로 곧장 덮칠 뻔한
바퀴를
급히 세웠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무슨 일 일어났는지
모르는
여섯 마리 개미들이
무사히 가던 길 간 후에야
다시 유모차 손잡이에 힘을 주었습니다
고작 3분
빨리 와 무얼 하려고 그렇게 서둘렀던 걸까요
굽어진 길 돌아오다 보니
몸은 땀에 조금 더 젖었어도
생각보다 조금 더 걸었어도
참 좋았네요
좋았어요
참
언제부턴가 빠른 길을 찾는 순간이 많아졌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잦아졌다. 그런 나를 멈춰 서게 하고 돌아가게 하는 건, 아이들이다.
오늘도 아이 덕분에 가로지르는 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걸어보았다. 역시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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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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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
저자
학교와 수업 이야기, 책 리뷰와 일상에세이를 주로 씁니다.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삶을 살고 싶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고등학교 국어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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