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Apr 10. 2020

뿌린 대로 거둔다니 할 말은 없지만

자매 전쟁이 남매 전쟁으로 대물림될 줄이야

"사랑아, 봄이 밀면 안 돼!"

"봄아, 오빠 머리카락 세게 잡는 거 아니야."


두 아이가 또 붙었다. 아직 14개월밖에 안 된 봄이가 37개월 사랑이와 싸움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봄이는 아무 뜻 없이 하는 행동, 예를 들면 사랑이가 좋아하는 동물 장난감을 만지는 등의 행동에 사랑이는 화가 나고 그 화를 소리지르기, 밀기, 넘어뜨리기 등으로 표출한다. 보통의 14개월쯤의 아이 같으면 그런 오빠의 공격에 그저 울음으로 답할 건인데, 봄이도 보통이 아닌 아이라 오빠에게 똑같이 반격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반격이라고 해 봐야 힘이 약해서 되지도 않지만, 아무튼 절대로 쉬이 물러나는 법은 없다. 그러다 보니 요즘 우리 부부는 두 아이 사이에서 매일 싸움을 뜯어말리느라 하루 에너지의 80 프로 이상을 소진하고 있다. 말을 알아듣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싸움을 한다면 둘을 앉혀놓고 훈육이라도 하고 설득이라도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봄이가 너무 어리니 누구 하나 다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오늘 또 서로 미끄럼틀을 먼저 타겠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서로 엉겨 붙은 아이들을 떼어놓으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싸워대니 정말 이러다 두 아이가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겨우 아이들을 재워놓고는 친정엄마랑 통화를 하며 넋두리를 했다.


"엄마, 진짜 둘이 어찌나 싸워대는지 말리는데 진이 다 빠져. 봄이도 진짜 만만치 않아서 사랑이가 밀면 같이 밀고는 둘이서 머리카락 뜯고 장난 아니야."

"다 뿌린 대로 거 둔 댔다. 나는 니랑 영이랑 둘이 웬수 될 줄 알았다. 하도 싸워대서. 니는 할 말 없다. 다 니가 한대로 돌려받는 거다."  


엄마의 말에 진짜로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진짜 뿌린 대로 거둔다면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내게는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나와 여동생은  엄마 말대로 정말로 원수가 만난 것처럼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렇게 싸울 일이 뭐가 있었을까 싶은데, 우린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웠다. 우리 자매 전쟁의 기록은 숱하게 많지만, 우리가 싸웠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떠올리는, 아주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다.


 살 때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짐작하건대 둘 다 초등 저학년, 혹은 나는 초등학생이고 동생은 유치원생 정도였던 것 같다. 그날도 별 것 아닌 이유였겠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별 것이었을 일로 크게 싸운 후였다. 자려고 누웠는지 엄마에게 혼이 나서 둘 다 씩씩거리다 누웠는지, 좁은 이부자리에 둘이 함께 누웠고 나는 동생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화가 덜 풀려 구시렁대며 좀 울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계속 더 화가 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 몰래 한마디 더 하려고 동생 쪽으로 휙 방향을 틀어서 돌아눕는데 내 왼쪽 팔꿈치에 뭔가가 툭하고 부딪혔고 이내 동생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마 동생도 동시에 돌아누웠던 모양인데 그러다 내 팔꿈치에 코를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보니 동생이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피를 보니 막연히 너무 무섭고 겁도 났다. 피를 흘리는 동생을 데리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런데 동생이 누워있던 상태에서 코피가 났다 보니 피가 코 뒤로 넘어가 입에서도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던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동생도 코와 입에서 동시에 피가 나니 놀라고 무서웠는지 우리가 싸우던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언니야"를 연발했다.


"영아, 미안해. 언니가 진짜 미안해. 죽으면 안 돼."


동생이 입에서까지 피를 쏟으니(지금 생각해보면 입으로 넘어온 피를 뱉은 것이었겠지만) 어린 나이에 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울면서 죽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오히려 동생이 자기 안 죽는다며 나를 다독이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 튀어나간 다음 말은 정말로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영아,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엄마한테 혼날 게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동생은 자기 괜찮다고 엄마한테 안 이르겠다며 도리어 꺼이꺼이 우는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그날 그 좁은 이부자리에서 서로를 꼭 안고 잠이 들었다. 그것이 내가 동생을 안아준, 유일무이한 기억이다.




 뒤로 우리가  조금은 다정한 자매가 되었을까? 그럴 리 없다. 우리는 그 뒤로도 정말 끝도 없이 싸웠다.  옷 한 벌로, 서로 심부름 안 하려고, 한 대뿐이었던 컴퓨터로, 책상 자리로도 싸웠다. 그렇게 무궁무진한 소재로 끊임없이 싸우는 우리에게 엄마는 늘,


"무슨 웬수 지간도 아니고 왜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엄마 죽고 나면 세상에 너거 둘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하노!"


라며, 엄마의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까지 꺼내 들어 사정했다. 제발  좀 그만 싸우라며.


자매 전쟁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종전되었다. 내가 대학에 가고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던 해, 희한하게도 그 전쟁이 단숨에 끝나버렸다. 그때 나는 대학생활에 빠져 정신없이 집 밖으로만 돌았고, 생은 우등생이어서 정신없이 공부만 했다.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서였는지, 이제 둘 다 좀 컸다고 그랬는지 아무튼 딱 그때부터는 단 한 번도 동생과 싸운 기억이 없다.


오히려 동생과 나는 엄마에게는 말 못 할 비밀들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고, 동생이 성인이 된 후로는 종종 둘이서 소주잔도 기울이는 다정한 자매지간이 되었다.


동생과 나는 요즘 세상 둘도 없는 친구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둘째를 동생은 첫째를 출산해서 같이 육아휴직을 한 터라 거의 매일 통화를 하고 일상을 카톡으로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의 일상을 위로하고, 응원하며 다시없을 다정한 시간들을 보내는 중이다.




렇게 원수 같던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것을 보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와 봄이는 지금부터 수년간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워댈 일만 남았구나. 그걸 생각하면 암담하지만, 그 후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일 큰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버티는 수밖에,

그리고 어쩌면, 봄이가 말을 알아듣고 훈육이 가능한 나이가 되면 오히려 덜 싸울지도 모른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될지도, 아니 틀린 말이라면 좋겠다.


얘들아, 내일은 조금 덜 싸워보는 게 어떻겠니. 뿌린 대로 거두는 건 엄마가 자신이 없는데 좀 덜 거두게 해 줄 수는 없을까? 제발.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은 하루 5분 미만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이야깃거리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