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을이 왔다(오규원)

by 진아

[시쓰는 가을] 열여섯 번째 시


가을이 왔다(오규원)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출처: <두두>, 문학과지성사, 2008


아침저녁 온도가, 바람이 가을임을 실감하게 하는 날들입니다. ‘가을이면, 가을다운 시 한 편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골라본 오늘의 시는 ‘가을이 왔다(오규원)’입니다.


‘가을이 왔다(오규원)’는 가을을 맞이하는 시입니다. 대문을 열지도 않고, 곧장 현관 안으로 들어온 가을.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들이찬 가을. 강아지의 귀 사이로, 매미소리 사이로, 돌 사이로 온 가을. 친구의 엽서에 한동안 머물렀다가 어느 순간 내 손바닥 위에까지 떨어진 가을. 멀리서 조금씩, 그러다 훅 다가온 가을을 잘 표현한 시예요.


“엄마는 어떤 계절을 제일 좋아해?”

“엄마는… 봄이랑 가을?”

“아니~ 하나만 딱 고르면?”

“딱 하나만? 둘 다 좋은데…”

“안돼. 딱 하나만 골라봐!”

“음… 그럼…. 가을!”

“왜 가을이 좋은데?”

“음, 여름 내내 정말 덥잖아. 그러다 가을바람이 불면 아무것도 안 해도 기분이 좋아져. 안 그래? “

“맞다! 모기도 없어지고.”

“그것도 그렇네.”

“또?”

“또? 음… 가을은 햇살도 너무 따갑지 않고 적당히 따뜻해. 은행이랑 단풍도 예쁘고.“

“맞다! 가을 지나면 산타할아버지 오는 날도 있지? 엄마 아빠 봄이 생일도 있고. 그럼 또 내 생일이 있는 봄도 다시 오고!”

“그래, 그렇게 또 무사히 한 살 더 먹겠네.”


아이와 대화를 하다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이라는 것을요. 매사에 호불호가 강하지 않은 저는 계절도 봄은 봄대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좋았어요. 너무 더운 여름과 너무 추운 겨울은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몇 개도 더 댈 수 있지만, 적당한 온도와 바람을 지닌 봄과 가을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거든요. 봄꽃은 봄꽃대로, 가을 낙엽은 낙엽대로 매혹적이었어요. 겨울바람 이후 맞는 따스한 봄바람은 봄바람 대로, 여름 무더위 이후 맞는 선선한 가을바람은 가을바람 대로 기꺼웠고요.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아이의 성화에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49:51 정도의 비율로, 가을이 더 좋다는 결론이 났어요. 가을이 좋은 이유를 캐묻는 통에 뻔한 것들을 이유라 말했지만,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잠든 밤, 글을 쓰며 가을이 좋은 이유들을 떠올려 봅니다.


파스텔톤의 봄과 달리, 선명한 색채를 지닌 가을이 좋습니다. 일 년 동안 싹 틔우고 꽃 피운 자리에 열매 맺는 가을이 좋아요. 바람 한 점 없던 한여름밤을 지나 선선한 바람 불어오는 가을밤도 좋고요. 창문을 살짝만 열어놓고 잠들어도, 새벽이면 찬공기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오게 되는 가을의 온도도 좋습니다. 제 몫을 다하고 파르르 떨어지는 가을 낙엽의 바스락거림이 좋아요. 셔츠 위에 멋스럽게 걸쳐 입는 가을 재킷도 좋고요. 해질녘 붉게 떨어지는 노을 아래 재킷의 단추를 여미며 걷는 가을 산책도 좋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이기고 제 몫만큼 여문 가을 과실도 좋아요.


이렇게 쓰다 보니, 가을이 좋은 이유를 한도 끝도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가을이 좋은 이유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나이도 한여름을 지나 가을로 넘어서는 길목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요. 생의 여름날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날들이라면, 지금의 저는 그날들에서 아주 조금 빗겨선 참입니다. 생의 봄과 여름을 보내는 동안 참 열심히 살았고, 부단히 애썼다는 생각이 들어요. 덕분에 지금 저의 인생 시계는 여전히 한낮은 쨍쨍한 여름날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여름과 초가을 어디 즈음에서 째깍째깍 흘러가는 중입니다.


사계절 중 가을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깊어질 생의 가을도 만끽하고 싶습니다. 생의 가을에도 좋아할 만한 것들이 즐비했으면 좋겠어요. 계절의 가을에서 좋아하는 것들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생의 가을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많으려면 매일을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겠지요. 재밌는 것들을 많이 찾아내고, 몰두할 만한 일들을 더 발견해야겠습니다. 다채롭고 새로운 가을을 꿈꾸는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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