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황동규)
[시쓰는 가을] 열아홉 번째 시
즐거운 편지(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출처: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오늘 드리는 시는 무척 유명한 시입니다.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보셨지요? 특히 1연!) ‘즐거운 편지(황동규)’는 한국인의 애송시 목록에서 결코 빠지는 법이 없는 시지요. 시가 발표된 지 50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마도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쉬운 언어로 표현하되, 성숙한 사랑이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부분을 다룬 것이 아닐까 해요.
우선 시상 전개 과정에서 낯선 비유나 어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산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평이한 시어들로 쓰였지요. 하지만 산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사랑은 배경처럼 그대 뒤에 머무는 것,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과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구구절절한 에피소드 없이, 아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이 단정한 시어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마음이 허물어질 수밖에요.
사랑한다는 이유를 상대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유는 ‘내 것으로 삼는 것’이에요. ‘사랑하니까 너의 모든 것을 내가 알아야 한다, 너는 나의 뜻대로 해야 한다’는 식의 사랑은 어긋난 마음, 즉 집착일 뿐입니다. ‘즐거운 편지(황동규)’의 사랑을 알고 보면 더 그래요. ‘즐거운 편지’에서는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일’, 즉 사랑하는 일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라고 합니다.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이라고 해요. 언젠가는 그칠 것이나, 그때까지는 ‘꽃 피고 낙엽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아무런 계산도 대가도 없이 그대를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배경처럼 사랑하는 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롯이 사랑하는 일은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미숙한 사랑일수록 배경보다는 전면에 서고자 하고, 기다리기보다는 재촉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니 그저 머무르고 기다릴 수 없어요. 끝없이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고, 상대의 눈에 들고 싶습니다. 꼭 그 마음으로 내 마음을 상대에게 드러내고 싶고, 나의 눈에 상대의 모든 것을 담고 싶어집니다. 성숙한 사랑은 달라요.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는 한 발 물러설 줄도 압니다. 상대가 괴로움에 허우적거릴 때면 조심스럽게 곁에 머물러주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그칠 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주저하지도 않지요.
사랑에 대한 시를 읽고 쓰다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여러 사랑들을 떠올려 봐요. 남편과의 사랑, 아이들을 향한 사랑에 ‘성숙’이라는 단어를 놓을 수 있을까, 하고요. 여전히 제 사랑은 성숙보다는 미숙 쪽에 좌표점을 찍고 있는 것 같네요. 오늘도 시를 통해 마음을 바로 세워봅니다. 부단히 읽고 쓰다 보면, 사랑의 좌표도 성숙의 영역으로 성큼 나아갈 날이 오리라 믿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