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타는 분들께, 이 시를!

가을(이재무)

by 진아

[시쓰는 가을] 스물두 번째 시


가을(이재무)


검붉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듯

들어올려진 생활에

거듭 삽날 들이대며

농성중인 가을

나는 저 분노한 가을이 쳐놓은

추억의 바리케이드 뚫고 나갈 재간이 없다

떠난 것들

한꺼번에 몰려와 멱살 잡고

흔들 때마다 마음의 방에

가득 쏟아져내리는 검은 기억의 퇴적층

잦은 구토로 링거 꽂은 팔처럼

파랗게 여위어 가는 영혼

아아, 누가 저 오래 굶주린

사나운 짐승의 고삐를 쥐어다오


<저녁 6시>, 창비, 2007


가을이 무르익어 갑니다. 최근 몇 년을 돌아봐도 이렇게 긴 가을을 만끽했던 해는 없었던 것 같아요.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선선합니다. 앞서 ‘가을이 왔다(오규원)‘을 소개해 드릴 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길게 누리는 가을 덕분에 요즘 저는 대체로 기꺼운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환절기를 피하지 못하고 어김없이 감기에 걸려 몸은 고생 중이지만요.)


오늘 소개해드릴 ‘가을(이재무)’도 가을을 배경으로 한 시입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앞서 소개해드린 ‘가을이 왔다‘와는 사뭇 달라요. 이 시는 가을에 인격을 부여하고 있는데요. 이 가을이 별로 다정하지 않아요. 차분하지도 않고요. ’검붉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라고 시작하는 시를 읽어가다 보면, 가을이 깊어지는 것이 조금 두려워질 지경입니다.


시에서 화자가 가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좀 더 살펴볼게요. 화자는 자신의 생활이 ‘들어올려진 생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화자는 가을이 오면서 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릴 만큼 심정적으로 번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을은 그 번민을 부추기는 듯합니다. 안 그래도 흔들리는 삶에 ’삽날을 들이대며/농성중‘이라니요. 왜인지 알 수 없으나, ’분노한‘ 가을은 ’추억의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에 ‘추억’을 담처럼 쌓아놓고는 꼼짝도 못 하게 하는 거죠. 화자는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해요. ‘떠난 것들이/한꺼번에 몰려와 멱살 잡고/ 흔들 때마다/마음의 방에/가득 쏟아져내리는 검은 기억의 퇴적층’라는 표현은 그리운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마음이 몹시 괴로운 상태를 뜻해요.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신을 ’잦은 구토로 링거 꽂은 팔처럼/파랗게 여위어 가는 영혼‘이라고 묘사했을까요. 결국 화자는 불특정다수에게 부탁하듯 말합니다. ‘오래 굶주린/사나운 짐승의 고삐를 쥐어달라‘고요.


화자는 가을이 오면 유난히 지나간 것들, 떠난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모양입니다. 가을이 그런 계절이기는 하죠. 더위가 물러나고 찬바람이 불어오면 괜히 몸을 조금은 움츠리게 되고, 한해도 절반을 더 지나 저물어가면 지나간 시간들을 자꾸만 곱씹게 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고, 지나가고 떠나간 것들을 떠올리며 괜히 아련하고 애틋해지기도 하는 그런 계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을 살짝 열어두었는데요. 와, 밤바람은 정말 차네요. 성큼 깊어진 가을이 느껴집니다. 시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가을 때문인지, 어둠 때문인지, 음악 때문인지. 괜스레 마음에 무게추가 드리워집니다. 오래전 어느 날, 그때 그 사람, 먼 과거의 그 순간들이 검붉은 가을의 형상으로 쳐들어오는 듯합니다.


이럴 때는, 얼른 잠을 청해야 합니다. 오래 머물렀다가는 필시 눈물샘이 터지고야 말 테니까요. 깊어가는 가을, 가을이 쳐놓은 추억의 바리케이드 속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계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가을(이재무)’를 읽어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누구에게나 가을은 그런 계절인가 보다, 그 생각만으로도 이 가을을 잘 넘어갈 수 있을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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