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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26. 2024

[소설] 몸을 움직이는 일은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일

<풀업> 강화길

바야흐로 한여름입니다. 모두 무탈한 날들 보내고 계신가요. 최근에 [새해에는 책 한 번 읽어 볼까요] 매거진의 발행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지요. 이제부터 다시 박차를 가해볼 테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이번 주는 본격적인 책 소개 전에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저는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걷는 행위 자체도 좋고, 걷는 동안 주변 환경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음악과 나만 남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아요. 걷고 난 후 몸의 온도가 약간 올라갔을 때 조금 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것도 좋지요. 원래도 걷기를 즐기던 편이었지만, 최근에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에 우울이 찾아오면서 걷기가 더 좋아졌습니다.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한참을 걷다가 몸의 고통이 느껴질 때쯤이면 마음의 우울감이 잠시 잊히는 것도 참 좋았어요.      


한 석 달쯤 열심히 걸었을까요. 극심한 무더위가 찾아오면서 더는 실외를 걷기가 어렵더군요.(저는 우리나라에서 더위로 손꼽히는 도시에 살고 있답니다.) 아쉽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를 온 지 벌써 8년이 되어가는데요. 8년 만에 처음으로 아파트 커뮤니티에 있는 헬스장에 가보았습니다. 꽤 많은 운동기구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제 목표는 오직 하나, 러닝머신이었어요.      


헬스장에 들어서면 다른 운동기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러닝머신 위로 올라섭니다. ON버튼을 누르면 러닝머신의 벨트가 아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요. 곧장 속도를 6으로 맞추고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5분을 걷고 나면 몸의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면 속도를 8로 올려 뛰기 시작해요. 그렇게 5분, 다시 6으로 5분, 다시 8로 5분……. 그날그날 저에게 허락된 시간 내에서 어떤 날은 40분, 어떤 날은 1시간, 어떤 날은 낮에만, 어떤 날은 낮과 밤에 2번씩 러닝머신 위에 올라섭니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 입고 있던 옷이 축축할 정도로 땀에 젖을 때쯤 러닝머신의 OFF버튼을 누르고 바닥에 내려섭니다.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호흡을 가다듬다 보면, 어쩐지 뛰기 전과는 조금 다른 ‘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묵은 감정들을 땀과 함께 흘려보낸 듯하달까요. 러닝머신을 뛴 지 이제 열흘쯤 되어가는데, 처음에는 고작 5분을 뛰면서도 숨을 헉헉거릴 만큼 너무 힘들었어요. 3분만 뛰고 속도를 낮추고 싶은 유혹을 참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는지요. 이제는 5분 정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충분히 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그 이상은 좀 힘들지만요. 어쨌든,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기꺼운 일이었고,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마음도 아주 조금씩 빗장을 푸는 듯한 기분이 드는 요즘입니다.

     

책을 소개하는 매거진에 왜 이렇게 쓸데없는 운동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나 싶으시지요. 이번에 제가 소개해드릴 소설이 ‘몸을 움직여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강화길 님의 <풀업>이라는 소설이에요. 제목부터가 헬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운동 기구 이름입니다.


‘풀업’ 속 주인공 지수는 운동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직장인입니다. 생활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지수는 무기력한 인물이에요. 변화를 주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지수는 우연한 계기로 헬스장에 다니게 되면서, 처음으로 운동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몸을 움직이며 자기 몸의 근육들을 발견하게 돼요.


지수에게는 미수라는 여동생이 있는데요. 지수와 달리 사교적이고 완벽한 딸이에요. 지수와 엄마(영애 씨) 사이는 편안하지 않지만, 미수와 엄마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따듯합니다. 이제껏 지수는 그 관계를 전복시킬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오히려 엄마와 자신의 관계가 미수와 엄마 같지 않음에 죄책감까지 느껴왔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지수는 엄마인 영애 씨가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것.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는 것. 지수는 그 사실에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어색하다고? 딸이? 그럴 수 있나? 보통 엄마와 딸은 친밀하지 않나? (미수와 영애 씨 사이가 무척 가까웠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러나. 문제가 있나. 엄마에게 이런 감정을 갖는 게 맞나? 그래서 지수는 더 수다스러워졌다. (대화가 많은 관계는 정상적이니까.) 그래. 그건 일종의 회피였다. 문제를 모른 척하기. 그래서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기. 지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로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덮었다.
영애 씨를 향한 그 마음이 없는 척했다. (애초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과장을 했다. 아, 정말이지 그건 힘든 일이었다.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체력적으로 말이다. (말을 많이 하면 힘들다고 하지 않나. 정말로 그랬다.) 영애 씨와 함께 있으면 지수는 언제나 힘이 들었다.(29-30)     


동생 미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사에 자신보다 나은 성취를 보이는 동생에게 감히 자격지심도 느끼지 못했던 지수였어요. 미수가 은근히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수에게는 마음의 힘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운동을 시작하면서 지수의 많은 부분이 달라집니다. 지수에게 힘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몸의 힘은 곧 마음의 힘이 됩니다. 지수는 처음으로 엄마와 미수와의 관계를 바꿀 용기를 냅니다.     


미수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지수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미수와는 평생 이런 관계로 살아갈지도 몰랐다. 지수는 가족을 사랑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정하건대) 그들을 진심으로 미워했다. 지수는 이 마음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114)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에게 늘 상처받던 지수는 드디어 혼자 설 준비를 해요.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진심으로 미워하기도 하면서. 그 마음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엄마에게 못난 딸이자 동생에게 부족한 언니이기를 거부하고, 오직 지수 자신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지수는 금세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건 상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받침대에 무릎을 대고 섰다. 양팔을 기구에 걸었다. 힘을 줘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래, 이제 올라가면 된다.
올라갈 것이다. 지수는 등의 움직임과 느낌에 집중했다. 천천히,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별로 무섭지 않았다.(117)     


처음에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풀업’의 손잡이를 꽉 잡은 지수는 더 이상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에만 집중해요. 그리고 몸을 띄워 올립니다. 아마 지수의 마음도 함께 떠올랐을 거예요. 더는 ‘무섭지 않았다’라고 하는 걸 보면요.      


지수의 모습에서 최근의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지수처럼 헬스장의 근력 운동 기구에 매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만큼 러닝머신을 뛰면서 머릿속을 지배하는 여러 생각들을 털어냅니다. ‘중요한 건 상상이 아니-’니까요. 러닝머신 벨트의 속도가 올라가고, 그 속도에 맞춰 ‘탁, 탁, 탁, 탁’ 발을 내딛을 때면 오직 제 몸에만 집중합니다. 다리의 움직임, 자연스럽게 함께 움직이는 팔 동작,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호흡. 거기에 집중하는 동안, 몸은 정직하게 땀을 흘립니다. 그리고 꼭 그만큼 마음의 우울도 덜어냅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음의 우울을 겪고 계신 분들이나, 삶이 무기력하다 느끼시는 분들께 ‘운동하라’는 조언은 참 흔하지요.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기도 합니다. '마음도 괴로워 죽겠는데 몸까지 괴롭히라니!' 뾰족한 반발심이 더 크게 고개를 듭니다. 그런 분들께 꼭 권해드리고 싶은 소설이에요. ‘운동하세요’라는 처방의 말보다 훨씬 더 와닿으실 거예요. 아마 <풀업>을 읽고 나시면 ‘아, 나도 몸을 일으켜야겠다. 몸부터 움직여 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드시리라, 감히 확신해 봅니다.


저는 내일도 러닝머신 위를 힘차게 달려볼 예정입니다.

함께 운동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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