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차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제 마음을 낚아챈 적이 있습니다. 목소리의 깊이도 부족하고, 창법도 어설펐지만, 슬픔이 잔뜩 묻어 있는 노래가 가슴에 박히더군요. 그리고 그 뮤지션이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숀 레논(Sean Lennon)이라는 사실에 놀랐지요. 그가 존 레넌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만 비슷할 뿐, 음악성이 너무 딸린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의 음악이 제 맘 속으로 훅 날라든 것입니다.
숀 레논의 앨범, <Friendly Fire>에는 고통스러운 개인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연인이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나고, 바로 그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뒤에 감당해야 했던 슬픔과 분노로 채워져 있죠. 앨범의 제목 또한 그때 상황을 빗대어 ‘아군이 쏜 총’이라는 뜻의 Friendly Fire로 지은 걸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안고 앨범을 완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앨범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가공이 아닌 실제의 슬픔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청중의 마음을 두드리는 노래엔 가수들의 실제 아픔이 묻어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빌리 홀리데이와 에디트 피아프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성장했고, 니나 시몬이 흑인이라는 사회적 장애를 딛고 피아니스트로 성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마도 그녀들은 다른 음악을 남겼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노래는 우리의 가슴에 이렇게까지 와 닿지는 못했을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년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노래에서 삶에 대한 용서를 느낀다고 합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하고, 뉴욕 할렘에서 몸을 팔며 살아야 했던 그녀의 고단한 삶에 대한 체념과 용서가 배어있다는 것이죠. 초창기의 빌리 홀리데이는 싱그러운 목소리였지만, 후일 그녀는 거칠고 깊은 소리로 노래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마약에 절어 있던, 말년(말년이라고 해 봐야 40대 초반. 그녀는 44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의 음반을 들으면,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듯한 느낌과 함께 연민이 절로 일곤 합니다.
세계적인 가수로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또한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했던 연인이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고, 본인 또한 네 번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약물에 의지하는 삶을 살았죠. 특히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바로 연인 마르셀 마르당의 죽음이었는데, 이로 인해 명곡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슬프고도 아이러니합니다. <사랑의 찬가>는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그대만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죽은 연인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 담긴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가사를 모른 채 들어도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모에게 버림받고 창녀촌에서 길러진 그녀의 기구한 인생,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아픔이 노래 속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겠죠.
니나 시몬(Nina Simone)에겐 인종 차별이라는 사회적 벽이 고통이자 인생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녀는 세계 최초의 흑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스칼라쉽으로 줄리어드를 1년 다녔을 정도로 재능 있는 여성이었지요. 그러나 줄리어드에선 스칼라쉽을 연장해 주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커티스 음악원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합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팩트가 있는데, 니나 시몬은 줄리어드를 졸업하지 못했어요. 많은 분들이 그녀가 졸업을 한 것으로 아는데, 그녀의 부모님은 딸의 재능을 키워 줄 경제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다수의 다른 흑인들처럼 그들은 절대 빈곤에 시달렸었거든요.
결국 그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고 생계를 위해 밤무대에서 피아노를 치게 됐고, 가수로 까지 진출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좌절된 자신의 꿈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이 살해된 당시 시대 상황이 기름을 부어버린 것이죠. 그녀의 목소리가 다른 여성 재즈 싱어 보다 강하게 들리는 것은 타고난 중저음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흑인들의 울분을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기에다 가정 폭력과 약물 중독으로 얼룩진 결혼 생활은 그녀의 음악에 착잡함과 억눌린 한을 더하죠. 특히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에서는 힘든 삶을 향한 그녀의 체념과 한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곡을 듣노라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같이 슬픔의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삶 자체에서 우러나온 음악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줍니다. 단순한 목의 울림이 아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가수들의 목소리는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런 음악을 좋아하지만, 타인의 아픔이 빚어낸 소리를 즐긴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나의 내면에 가학성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본 적도 있었고요. 그러나 슬픈 운명의 뮤지션들에게 음악마저 없었더라면, 힘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는지요. 삶의 고뇌를 음악에 담아냈기에, 그들은 시름을 덜어내고 살아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바로 블루스의 탄생과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흑인들의 노동요를 그 기원으로 보는 블루스(Blues)는 낯선 땅에 끌려와 배고픔과 학대, 막대한 양의 노동을 이겨내야 했던 흑인들의 한이 서려 있는 음악입니다. 선천적으로 음악성을 타고난 그들은 노래와 흥얼거림을 통해 울분을 내뱉으며, 블루스라는 음악을 완성시켰습니다. 당시 농장주들은 혹시 모를 폭동에 대비, 작업할 때 흑인들끼리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찾은 감정의 분출구가 노래였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노래를 서로 주고받으며 시름을 덜어냈고, 위안과 힐링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힐링은 단지 블루스를 불렀던 농장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아픔을 노래한 수많은 가수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음악을 듣고 공감하는 사람들은 슬픈 음악에 자신들의 스토리를 끌어들여 울곤 합니다. 실연당한 사람이 슬픈 유행가를 들으면, 구구절절 다 자기 얘기 같아서 더 슬픈 감정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이 오히려 불행한 감정을 털어내주고, 기분 전환까지 해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슬픔에는 위험을 느끼지만, 예술을 통해 경험하는 슬픔은 가상체험이기 때문에 오히려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슬픈 음악을 들려주면 사람들의 감정이 처음엔 격앙되지만, 나중엔 비극적 감정이 오히려 낮아지고 평온한 감정이 올라갔다 하네요. 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감정의 정화’는 단지 비극에만 국한되지 않고, 음악에도 적용되는 논리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슬픈 영화나 책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 감정의 분출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효과가 음악에서도 가능하니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슬픈 음악의 순기능이겠지요. 그래서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아픈 상처를 음악으로 드러내고, 청중들은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뮤지션과 청중은 심리적 공생 관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Nina Simone이 오리지널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입니다. The Animals 내지는 Santa Esmeralda의 곡으로 알려져 있어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