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의 오페라가 그렇게 많아도 오늘날까지 아마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딱 손꼽아 '세비야의 이발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서 이야기 나눈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시리즈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같지만 두 작품 간에 약간은 다른 각색이 존재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피에르 보마셰'의 3개의 희극으로 이루어진 '트릴로지(trilogy)' 중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는 첫 번째 스토리를 근거로 하고 있고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30년 앞서 만들어졌지만 트릴로지 중 두 번째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체 2막으로 구성되어 역시 코믹 오페라 장르로 분류되며 1816년에 초연되었어요.
보마셰의 트릴로지는 '피가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돼요. 세비야의 이발사 작품에서는 피가로가 예전 알마비바 백작 궁정의 하인이었다가 현재는 이발사인 것으로 등장하는데, 2편의 스토리인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다시금 백작의 하인으로 나왔죠. 스토리 전개상 입퇴사를 반복한 건지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추측하건대 시리즈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각본가들 재량껏 요리해 활용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작품 전반의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신을 '린도로'라 칭하는 한 젊은 청년이 닥터 바르톨로의 집 앞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데요, 이는 그 집에 살고 있는 '로지나'에게 보내는 사랑의 노래예요. 닥터 바르톨로는 로지나의 후견인인데 말입니다, 단순히 그녀를 돌봐주는 보호자가 아니라 그녀를 잘 키워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자기가 결혼해서 함께 살려는 새까만 흑심을 품고 있어요. 장르는 코믹인데 내용은 왠지 스릴러죠?
문제는 어린 로지나를 보고 사랑에 빠져서라기보다, 그녀의 결혼 지참금을 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흑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거죠!
당시 '닥터'라는 타이틀을 달고 계신 양반들도 벌이는 시원찮았던 건지 단순히 결혼 지참금을 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기는 해요. 게다가 여자들이 결혼하는데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고요? 아이고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네요. 그러나 희극은 희극일 뿐 따지지 말자라고 외치며 일단 넘어가 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닥터 바르톨로였으니 로지나를 늘 감시하고 참견하는 건 당연하겠죠! 그런 와중에 로지나와 린도로라는 청년이 찌릿찌릿 케미가 통한 거예요. 사랑에 빠진 거죠. 그래서 스토리 전체의 흐름은 로지나를 닥터 바르톨로의 손으로부터 구해내는 가운데 일어나는 각종 에피소드들로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재치를 발휘하는 주인공은 당연히 피가로이고요!
이 작품의 초반에 등장하는, 사실 아주 많은 분들이 광고 속 배경 음악 등으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피가로의 아리아를 먼저 듣고 시작할게요. '나는야 거리의 만능 일꾼!'이라는 곡인데, 피가로 자신이 세비야에서 얼마나 유능하고 인기 있는 인물인지를 스스로 떠벌리는 내용이거든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피가로의 아리아 한번 들어보시죠~ 피가로의 아리아 들으러 가기
앞서 이야기의 시작에 '린도로'라는 청년이 등장했잖아요. 사실 이거 진짜 비밀 아닌데요, 린도로가 바로 그 알마비바 백작이에요. 아주 젊은 시절의 백작인 거죠. 그가 로지나에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숨긴 이유는요, 로지나가 백작으로서의 부와 명예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가난한 학생신분으로 속인 거랍니다. 어쩜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가!
미리 결말을 스포 해드리자면, 백작은 결국 이 작품에서 로지나와 결혼에 골인하는데요, 그래서 로지나가 백작부인이 되는 거죠. 이렇게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한 부부관계도 세월이 지나면 진정 어쩔 수 없는 건가요? 백작이 다른 이의 여인에 눈이 멀어 초야권을 되살려내겠단 터무니없는 술수나 부리게 됐으니 말입니다.(피가로의 결혼中)
여하 간에, 알마비바 백작은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로지나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습니다만, 작품을 쭉 따라가다 보면 백작이 로지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흩뿌리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 자신의 성에 고용되어 있던 피가로의 영특함과 뛰어난 재치를 익히 아는 백작은 피가로에게 자신이 로지나를 만날 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청하죠. 그러나 피가로가 누굽니까? 맨입으로 도와줄 리가 없죠.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하려면 돈을 줘야 한다고 바로 거래를 하는데요, 로지나를 만나는 게 너무도 절실했던 백작은 아낌없이돈을 내어줍니다. 여인을 쟁취하기 위한 백작의 플렉스가 시작됐어요.
피가로가 꾀를 내어 알마비바 백작이 잔뜩 취한 척 연기를 하게끔 만들어 닥터 바르톨로의 집 안으로 침입하는 데 성공하는데요, 이들의 난동에 닥터 바르톨로는 경찰을 불렀고 피가로와 백작은 곧 체포될 위기에 놓입니다. 이때 백작이 상황을 모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네 그렇죠~ 슬쩍 경찰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돈을 쥐어줍니다. 당시 공무원들은 그리 청렴하지 못했던가봐요. 백작은 아주 손쉽게 이 위기를 빠져나가죠.
2막에 들어가면 아주 코믹한 상황이 한번 벌어집니다. 로지나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닥터 바르톨로의 집에 드나드는 음악 선생님 바질리오라는 인물이 있어요. 또다시 피가로의 계략으로 이번에는 백작이 아픈(?) 바질리오 선생을 대신해 찾아온 음악 선생님으로 등장합니다. 닥터 바르톨로의 정신을 다른데 팔기 위해 피가로는 그의 머리를 이발해 주는 친절을 베풀고 있고요, 그 와중에 대신 온 선생님이 린도로임을 알아본 로지나는 레슨 받는척하며 꽁냥꽁냥 몰래 그들만의 밀회를 즐기고 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바질리오가 찾아온 거예요. 난감하게 됐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갑자기 다들 한 마디씩 합니다.
"바질리오 선생! 얼굴에 열이 나는 거 같아요~ 봐바 손도 막 떨리고 있네!"
(바질리오 둥절 & 닥터 바르톨로 둥절)
"맞아요 맞아... 엄청나게 아파 보이는데 더 쉬지 어쩐 일로 온 거예요!?"
피가로, 로지나, 긴가민가 싶지만 어쩐지 낯익은 남자(백작)가 자꾸만 아파 보인다고 호들갑을 떠니, 왠지 자기가 아픈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겁니다. 한 사람 아프게 만들어버리는 거 무척 쉽지요~
그렇게 여전히 어리둥절한 바질리오에게 백작이 몰래 다가가 돈을 쥐어주며 얼른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질리오는 곧장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는 돌아가요.
그러게 어느 시대에나 '돈'의 위력이란 무시할 수 없는가 봐요. 물론 우리가 돈을 전부로 알고 그것의 노예가 되면 안 되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사랑을 얻는 데에도 돈이 많으면 좀 더 쉬울 수는 있나 봅니다. 여자도 예쁘면 나이가 많은 남자나 젊은 남자나 매력을 느끼는 것 역시어느 시대에나 한결같은 현실인 듯하고요. 저는 그냥 다시 태어나야 되겠습니다.
극의 시작에 백작이 세레나데를 불렀다고 했잖아요. 잠시 후 등장하는 로지나의 방에서 그녀가 부르는 '방금 들린 그대 음성'이라는 아리아가 상당히 많이 알려진 곡이에요. 일반적으로 오페라 속의 여주인공은 '소프라노'가 맡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 작품은 드물게 좀 더 낮은 음역의 '메조소프라노'가 주인공 로지나 역을 맡습니다. 원래 로지나의 아리아가 '마장조'로 쓰였는데, 간혹 반음을 올려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이 부르기도 해요.
*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소프라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음역대를 가진 소프라노
앞서 로시니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벨 칸토' 창법에 대해 언급해 드렸는데요, 벨 칸토 창법의 특징을 바로 알아차려볼 수 있는 '방금 들린 그대 음성'을 한번 들어보실까요? 음의 변화가 경쾌하고 빠른데 굉장히 꾸미는 음이 많다는 걸 유념하고 들어보세요.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요, 피가로와 로지나가 함께 부르는 '바로 나잖아요! 나는 참 행복한 여자예요'라는 이중창입니다. 닥터 바르톨로의 집에 몰래 찾아온 피가로가, 하루라도 빨리 로지나와 결혼하겠다는 닥터 바르톨로의 속셈을 알려주며, 린도로에게 편지를 쓰면 자신이 전해주겠다고 말하죠. 그런데, 로지나는 린도로의 마음이 확실한 건지 반신반의했나 봐요. 그 청년이 고백한 대상이 내가 정말 맞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피가로가 바로 확인해 주죠.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바로 당신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