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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02. 2016

만우절의 단상

유독 각진 턱선으로 인해 얼핏 강직해 보이기도 하는 그는 중요한 약속을 어겼다.

약속한 날짜를 훌쩍 넘기고도 아무런 연락도, 구차한 변명도 없으니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약속이었거나 애초에 약속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내심 괘씸함과 궁금함이 드는 찰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한 선배와 후배가 생각이 났다.     


선배는 늘 약속을 어겼다. 거의 매번 습관적으로 그랬으니 늘 어겼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서 그 선배와의 약속으로 뒤통수를 맞는 사람은 주위에 부지기수였고, 이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이 마치 자연스러운 모습처럼 된 선배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깨진 약속이 한참 지나고 난 뒤에야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나타나서 모두들 지쳐버린 추궁에도 그저 ‘허허’하고 웃을 뿐이다. 물론 그 사이에 연락이 두절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겨우 연락이 닿더라도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는 하는데, 워낙에 표정이나 음성을 감추는 재주가 없어서 그 변명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재미있을 뿐이다.

후배는 툭하면 잠수를 탔다. 공허한 전화기 너머 냉랭하지만, 지극히 친절한 여자의 목소리는 후배의 비서로 착각이 들만큼 자주 그랬다.

마찬가지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선배와 같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희한한 것은 꽤 오랜 시간을 그 선배와 후배는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도 늘 주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대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런데 그들에게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연락이 자주 두절된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일 -생계를 위해서든, 실리를 위해서든-이 있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불쑥 그 자리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실리와 이익만을 찾는 위인은 못되고 오히려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약속을 어긴 적도, 연락이 두절된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이 약속을 어기거나 연락이 두절될 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인해서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일도 있을 테지만,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민함과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때로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때로는 스스로 정리를 해버리고 다소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약속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지켜지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것을 ‘약속’이라고 부르겠지만, 지켜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상대가 없다면 성립될 수 없는 약속.     


표면적으로 보이는 강직한 외모 이면에 다분히 키치적인 면과 사춘기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가 ‘약속’이라는 개념을 그저 자신의 편의와 이익에 부합되는 중요도만으로 판단한다고 보기에는 무엇인가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그저 선배와 후배의 경우처럼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회피하거나, 까맣게 잊고 자신 속으로 침잠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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