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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13. 2022

그래도, 추억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대한 지 이십 년이 더 넘게 지난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 이상은 군대를 다시 가는 꿈을 꾼다. 그럴 때마다 매번 나는 이미 한번 갔다 왔다고 항변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끔찍한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서 절망한다.

간밤에도 꿈속에서 다시 또 재입대를 하게 되었고, 여전히 항변과 절규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강원도 원주의 작은 부대로 배치받게 되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인상의 선임들은 연병장 한가운데로 우르르 몰려나와 눈앞에 거대한 바위들이 박힌 산을 가리키면서, 이 고장이 자랑하는 소백산이라고 말을 했다. 강원도 원주의 외딴 부대에서 보이는 산이 소백산이라니. 나는 꿈속에서도 그 사실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산 정상에 가면 활짝 펼쳐진 목장이 있어 양들이 순진하게 뛰어놀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오래전 군생활 당시에 시누크라는 헬기를 타고 소백산에  적이 있다.  대의 군용 트럭에 나눠 타고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 어떤 허허벌판에 던져진 우리 부대원들은, 거대한 굉음과 바람을 몰고  헬기가 착륙할  땅에 납작 엎드린  차례를 기다렸다. 앞뒤로 프러펠러가 달린 헬기는  멋스러운 위용을 뽐냈고, 비록 군대에서의 훈련이었지만 나는 난생처음 헬기를 타본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아가리를 딱 벌린 헬기의 뒷문으로 차례로 탑승한 우리는 서로의 긴장한 얼굴을 멀뚱히 마주 보며 일렬로 앉았다. 대략 20분 정도 비행을 했을까. 그렇게 도착한 곳이 소백산이었다.

6월의 소백산은 철쭉이 한창이었다. 산을 타고 떼 지어 내려오는 군인들을 등산객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신기해했고, 군데군데 활짝 피어난 철쭉의 모습이 나는 왠지 처절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 한창 등산객이 많은 6월이었을까. 왜 철쭉은 6월에, 하필 소백산에서 그토록 속절없이 만개하는 것일까. 사전에 미리 알았다면 첫사랑 영자에게 미리 귀띔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아니지, 칼날같이 다림질한 군복을 입고 멋지게 광을 낸 전투화를 신은 늠름한 군인의 모습이 아니라, 땀에 절고 위장크림으로 범벅된 몰골의 내 모습을 영자가 본다면, 그 예쁜 영자의 두 눈이 마스카라로 얼룩지고 말 테지.


뛰다시피 하산한 우리들은 그 길로 충주에 위치한 부대까지 꼬박 24시간 이상을 행군해서 복귀한 걸로 기억한다. 야간에 졸면서 걷다가 또랑에 굴러 떨어진 어떤 후임병의 얼굴과, 어떻게 알고 준비했는지 실이 꿰어진 바늘로 자신의 발바닥에 부풀어 오른 물집을 야무지게 터트리던 어떤 선임병의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휴식시간에 나란히 누운 후임병과 담배를 태우며, 제대를 하면 소백산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내 말에, 꼬질꼬질한 얼굴로 새벽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던 후임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없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컴컴한 시골길에서의 개 짖는 소리와 몰래 따먹은 복숭아의 달콤한 맛, 어느 야산 중턱에서 미리 기다리던 밥차에서 뿌옇게 스며 나오던 헤드라이터의 불빛, 지친 다리를 죽 펴고 김치도 없이 먹었지만 꿀맛 같았던 컵라면의 냄새, 새벽 해가 희미하게 밝아올 때의 평화로운 시골 풍경들은 아주 가끔 아련한 추억처럼 생각이 나기도 한다.

제대 후 한참이 지나, 어느 해 6월에 소백산을 찾았을 때도 철쭉은 속절없이 만개해 있었다.


비록 꿈속이지만 입대를 앞둔 심정은, 그것도 한번 갔다 왔지만 매번 이유도 모른 채 재입대를 해야 되는 상황은 몸서리쳐지도록 끔찍하다.


아버지는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김신조 일당이 남한으로 넘어오는 바람에, 무려 6개월을 더 연장해서 군생활을 하셨다고 생전에 허탈한 웃음으로 몇 번 말씀하셨다.

합리적인 이유도, 그 어떤 보상도 없던 시대에 그저 나라에서 시키니 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냉랭한 공기의 낯선 야산에서 포위당한 채 스스로 죽음을 택한 간첩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햇살이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공포에 내몰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총탄이 오가는 참혹한 전장에서 밤새 어떤 꿈을 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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