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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0. 2024

웰컴투 방비엥


"미스터 홍, 환영합니다."

곱슬머리에 까만 얼굴을 한 청년이 호텔 카운터에서 반겨주었다. 라오스에서 영어를 곧잘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럴 때는 내 짧은 영어에 상관하지 않고 말들이 술술 나왔고, 상대방은 내 말들을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엘비베이터도, 조식도 없지만 방에서 바라보는 풍경하나는 끝내준다는 후기 하나만 보고 아고다를 통해서 예약했는데, 2층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아! 그래. 내가 은연중에 원하던 호텔방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이런 거였을 수도. 커다란 창밖으로 울창한 숲들과 멀리 보이는 둥글고 완만한 산들이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나는 짐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문대신 창을 넘어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나무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니 숲들 사이로 보이는 남쏭강과 보트들,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역시나 라오스 어디에서나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해 질 녘이 되면 풍경은 얼마나 더 멋지게 변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풍경과 함께라면 그 순간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그전에 우선 해가 지기 전에 블루라군을 다녀오고 싶어 얼른 카운터로 내려가서 청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길이 조금 거칠지만 오토바이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예요. 블루라군 3이 가장 볼만하고 넉넉잡아 1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마스크 꼭 챙겨가세요 " 청년은 눈을 찡긋하며 대답해 주었다.

청년의 말만 믿고 숙소에서 가까운 렌트삽으로 가서 여권을 맡기고 스쿠터를 빌렸다. 여행자거리로 가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며 감을 익히고 기름을 채운뒤 내비게이션을 켜고 블루라군 3으로 출발했다. 남쏭강을 건너는 나무다리는 무너지지는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살짝 겁이 났지만, 다리를 건너 조금 지나니 한적한 시골길이 펼쳐졌다.

낮고 오래된 집들, 갑자기 나타나는 소떼들, 길가에 줄 서서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한 무리의 꼬맹이들. 그 옛날 우리의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목가적인 풍경과 너무 닮아 있었다.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길에서는 간혹 트럭이나 관광객들이 탄 버기카가 지나가면 눈앞을 가릴 정도로 모래먼지가 일었다. 숙소의 청년이 마스크를 꼭 챙겨가라고 말한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욱한 먼지가 사라지고 나면 어김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황홀했다.


블루라군 3에 도착하니 서양인들 한 무리가 물에서 수영을 하고 다이빙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주변에 놓인 평상과 쉼터에도 많은 서양인들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있어, 타국에서 또 다른 타국의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짙은 녹색의 물과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의 모습은 미지의 낙원을 떠올리게 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짐을 맡길 데가 없어 수영은 하지 못하고 나는 평상에 앉아 그들이 노는 모습과 풍경만 한참 바라보다가 볶음밥과 맥주 한 병을 시켜, 쇼라도 보는냥 가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적적하지만 평화로운, 외롭지만 안락한 오후였다.


여행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다 보면 정작 그 목적지보다 찾아가는 과정이 더 흥미로울 때가 많다. 목적이라는 것에 굳이 연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은 한층 더 여유로웠다. 오는 길에 보지 못했던 사소한 풍경들에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딸랑딸랑 종소리를 내며 줄지어 길을 건너는 소떼를 만나면 나는 스쿠터를 멈추고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축사에 갇혀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목적으로 비대하게 살만 찌는 소들에 비하면, 풀을 뜯고 한가롭게 다닐 수 있는 이곳의 소들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최대한 천천히 스쿠터를 몰며 주위의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이곳에도 언젠가 빌딩이 들어설 것인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저 내 욕심일까.

열기구가 풍선처럼 하늘에 둥둥 떠있고, 글라이더가 느리게 맴돌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거울을 보니 그사이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신발과 옷에는 모래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나는 빠르게 샤워를 한뒤 슈퍼에서 사 온 캔맥주를 집어 들고 베란다에 앉아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남쏭강에는 해가 지기 전에 보트를 타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둥글고 예쁜 주황색의 해가 산머리에 걸쳐져 한없는 아량을 품고 이곳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느낌이었다. 이 작고 소박한 베란다에서 받은 위안은 내가 때때로 지칠 때, 불현듯 떠올라 위안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움이 되어 나를 또 이곳으로 오게 할지도.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고, 그 감사하는 내 마음에 또 감사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서서히 잠식할 때쯤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와서 잠시 누웠다. 이런 순간은 새삼스럽게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또 허기를 채워야만 하는 단순한 생리를 생각하면 여행이 곧 일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스쿠터를 타고 천천히 여행자거리로 나서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적당한 곳에 스쿠터를 세워두고 야시장으로 가보았다. 줄지어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곳곳에 단체로 여행온 한국 관광객들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비엔티안의 야시장보다 규모도 훨씬 작고, 진열된 물건들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야시장을 나와 큰길에 들어서니 툭툭이와 차들과,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뒤엉켜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활기찬 밤거리의 분위기가 풍겼다. 

제법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는 식당에 들어가 쌀국수를 시켰다. 이상하게 이곳에서 먹는 쌀국수는 질리지가 않는다. 고기와 동그란 미트볼이 들어간 쌀국수는 국물맛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지. 같은 메뉴라도 동네마다 지역마다, 무엇보다 식당의 주인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지. 그리고 다음날이 되거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음식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오르곤 한다.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음식 사진에는 흥미를 가지면서 정작 내가 먹는 음식은 그저 먹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심리는 어떤 것일까. 그렇지만 음식은 어디까지나 먹기 위한 것이지.

여행지에서의 혼자 있는 밤은 유독 외로운 법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싫지만은 않다. 그리고 혼자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때 가장 많이 하는 일중에 하나가 사람을 구경하는 일이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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