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와 보고 3편: 제안보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C안이 가장 낫습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회의실의 온도가 반도 내려갔다.
팀장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슬라이드를 넘기던 손이, 딱. 그 자리에서 멈췄다.
마치 ‘너, 지금 뭐라고 했지?’라는 무언의 브레이크처럼.
금요일 오전 10시.
공급망 대응안 검토 회의.
최대리는 며칠 밤 야근으로 구워낸,
말 그대로 ‘은근 정성’이 들어간 자료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A안, B안, 그리고 C안.
세 가지 대안을 비교한 표.
각 안의 단가, 리드타임, 리스크를 정리했고,
발표는 결론부터 시작했다.
“세 가지 안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C안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정적.
팀장은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슬라이드를 한 장 앞으로 되돌렸다.
부서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C안... B안에서 사양만 살짝 바꾼 거 아닌가요?
같은 업체고, 같은 라인인데…
결국 B안의 변형이지,
완전히 다른 대안은 아니잖아요.”
순간, 최대리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눈은 모니터를 향했지만,
뇌는 이미 등줄기 따라 흘러내린 식은땀을 쫓고 있었다.
“네… 말씀대로 구조는 같고,
사양만 조정해서 안정성을 확보한 안입니다.”
“그럼 A, B, C가 아니라
A, B, B’ 정도로 보는 게 맞겠네요.”
“네, 그렇긴 합니다…”
‘그걸 꼭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나…
라벨만 다를 뿐 속은 같은데…’
최대리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쪼그라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분명 ‘선택지를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믿고 준비했는데,
결론부터 먼저 말하고 들어간 순간,
회의실은 어느새 배심원이 가득 찬 법정이 되었고,
최대리는 자기 안건을 방어해야 하는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때, 팀장이 다시 화면을 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지금 리스크 판단 기준이… 단가 위주죠?
근데 이번 건은 리드타임이 제일 중요한 거 아시죠?
4주 넘으면 애초에 탈락인데…
말씀하신 C안은 지금 딱 4주니까,
단가가 아무리 낮아도 리스크는
‘medium’이 아니라 ‘high’로 보는 게 맞지 않나요?”
순간, 뒷목이 뜨거워졌다.
등 아래로 천천히 식은땀이 흘렀다. 맞다.
C안은 단가는 가장 낮았다.
하지만 리드타임은 딱 4주였다.
사실상 기준선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안이었다.
C안의 업체가 공급일정,
품질도 좋고 대응도 타 업체보다 훨씬 좋아
종합적으로 판단해 Medium으로 표기했지만,
납기일정 그대로만 보자면 적어도 Medium이나 High로 둬야할듯하다.
Risk란의 점수산출 방식을 납기에 가산점을 두고 산정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이 업체가 타 업체보다 대응도 좋고,
믿을만 하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해야 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슬쩍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이마까지 붉게 물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보고를 ‘설득’으로 바꾸고 싶었던
내 무의식이 그걸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회의는 옵션을 고르는 회의가 아니었다.
비교 프레임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회의로 흘러갔다.
최대리는 30분 동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 논리를 되짚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회의가 끝난 뒤,
팀장은 조용히 말했다.
“최대리, 제안 보고는
결론을 검증받는 자리가 아니라,
같이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리예요.
누가 정했느냐보다,
‘같이 정한 안’이 더 오래 갑니다.”
슬라이드를 열자마자,
그는 가장 먼저 발표 첫 장을 지웠다.
결론부터 들이밀던 방식은
그날 회의실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말 대신 표를,
설득 대신 비교를 준비했다.
보고서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그는 자신에게 세 가지 원칙을 새기기 시작했다.
회의 시간은 15분.
설명은 10분 남짓.
나머지 5분은 결정의 시간.
말이 길면 판단이 늦어진다.
‘말은 줄이고, 비교표는 말하게 하자.’
그래서 최대리는
한눈에 들어오는 표,
직관적인 그래프,
여러 요인이 얽힌 건 Pugh Matrix로 시각화했다.
회의에선 말 많은 사람보다,
잘 정리된 표 하나가 더 힘이 세다.
“이 항목은 어느 게 더 낫죠?”로 질문이 오지 않고
비교가 명확하게 되어서,
“이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로 넘어가는 구조.
그게 이제 최대리의 보고서 기본값이다.
“C안이 낫습니다”로 시작했던 발표.
그 말 한마디로 회의는 검증의 전장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번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리드타임입니다.
그 기준을 중심으로 3가지 안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회의는 ‘검증’이 아니라 ‘선택’으로 흘러간다.
결론은 내가 주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내리게 만든다.
‘이건 당신이 고른 겁니다’라는 착각.
그게 최고의 설득이다.
상대의 입에서
'그럼 C안이 제일 낫네'라고 말이 나오면
본인이 판단했다고 생각해서
C안을 본인이 알아서 리더쉽에 세일즈하고 다니게 된다.
이제 최대리는 보고서 마지막 장에 항상 Next Step이라는 제목을 단다.
“이 제안은 아직 다듬을 여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보완은 이 방향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회의 중 나온 아이디어는 여기에 정리했습니다”
그 한 장이 있으면, 제안이 덜 다듬어졌어도 신뢰는 깎이지 않는다.
완성된 제안은 토론의 끝이지만, 여지를 둔 제안은 팀워크의 시작이다.
때로는 정답을 더 뚜렷하게 보이게 하려면,
그 옆에 대비되는 약한 안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가끔은 정답을 빛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틀린 보기를 섞는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Decoy(디코이) 효과라고 부른다.
“참고로 D안도 있긴 했는데,
리드타임이 6주라 공급 대응 차원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회의에선 이렇게 배제 가능한 안을 보여주면
남은 선택지가 훨씬 안정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D는 아니지”라고 말하며,
스스로 오답을 걸러냈다고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결론은 훨씬 강한 실행력을 가진다.
이제 최대리는 안다.
제안이란 정답을 들이미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라는 걸.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시각화하고,
판단 기준을 함께 세우고,
결론은 스스로 고르게 유도하고,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현명하고 정확한 판단 감사드립니다.”
결정은 훨씬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