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와 보고 4편: 진행보고
“팀장님, A 프로젝트는 현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민수는 그 순간 팀장의 눈썹이 아주 잠깐 움직이는 걸 봤다.
슬라이드를 넘기던 손도 멈칫했고,
회의실 안 공기는 조용했다기보다… 비어 있었다.
들은 사람들이 민수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너무 많은 보고가 오가고,
너무 많은 소음과 피로가 쌓여 있는 사무실이라는 전장 안에서
“별일 없다”는 보고는,
그저 또 하나의 배경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회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갔다.
그리고 민수는 그 속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얼굴이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민수는 파일을 닫지 못한 채,
마우스 커서를 같은 칸 위에 몇 분째 올려둔 채 앉아 있었다.
'실수도 없었고, 일정도 정확했고,
외주업체 일정도 내가 미리 점검했는데…
왜 이렇게 공기가 싸늘하지?’
누구보다 꼼꼼했고,
위험 요소도 사전에 다 제거했다.
자신이 없던 프로젝트였으면
이렇게 무탈하게 굴러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회의는,
자신이 없던 것처럼 지나갔다.
그 순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유진의 보고가 떠올랐다.
똑같이 순조로운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유진은 이렇게 말했다.
“○○팀 일정이 엇갈릴 뻔했는데,
지난주에 미리 체크해서 조정했습니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확인하고 확정드릴게요.”
짧은 한 줄.
하지만 팀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잘 캐치했네요. 깔끔하게 처리했어요.”
그 말 한 줄에 회의실 공기가 다르게 흔들렸다.
유진은 존재감을 남겼다.
민수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말한 그 문장이 얼마나 텅 비어 있었는지를.
“A 프로젝트는 큰 이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제도, 디테일도, 조정도 없는 그 말은
맹물 한 그릇이었다.
“문제 없는 보고는, 아무 맛 안 나는 국 같다.”
보고는 단순한 상태 알림이 아니었다.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는 일이었다.
유진은 단순히 정보를 나열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리스크를 발견했고,
어떻게 판단했고,
무엇을 조정했고,
무슨 시야로 프로젝트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었다.
그날 이후, 민수는 조용히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무탈하게 흘러가는 프로젝트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리스크를 사전에 감지했는지,
그걸 어떻게 판단했고,
왜 그렇게 조치했는지를
짧게라도 덧붙이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80% 진행됐고요,
초반에 ○○팀 일정이 살짝 엇갈릴 수 있어서
지난주에 미리 확인하고 조정했습니다.
다음에도 이 방식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말이 어색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팀장의 반응이 달라졌다.
“좋네요.
그런 식으로 사전에 잡아주는 게 제일 좋습니다.”
민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적용한 전략이었다.
진행보고는 그때서야,
민수에게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자신의 기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무탈함을 말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 무탈함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누가 그렇게 만든 건지
그걸 말해야 한다는 걸,
민수는 이제 안다.
예전엔 이렇게 생각했다.
‘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면, 그게 최고지.’
팀장도 굳이 자세한 설명 없이 그 말을 들으면,
“잘하고 있군” 하고 넘어가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보고는 ‘무탈합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무탈함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보여줘야 하는 무대라는 걸.
그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지난주 외주업체 일정이 꼬일 뻔했는데,
초반에 일정 불일치를 감지해서 ○○팀과 미리 조율했습니다.”
그 전 같았으면 ‘그냥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라고만 했을 상황이다.
하지만 그 말 한 줄을 덧붙였을 때,
팀장의 눈빛이 바뀌는 걸 봤다.
“이 친구 아니었으면 문제 커질 뻔했네.”
민수는 그때 신뢰는 투명성에서 나온다는 걸 배웠다.
민수는 이제 안다.
보고는 ‘현황 정리’가 아니라
‘하이라이트 영상’이다.
아무리 잘한 것도,
그냥 “문제 없습니다”로 끝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 일정이 평온했던 건,
제가 사전에 ○○팀과 리소스 조율해둔 덕분입니다.”
그 한 줄이 자신의 역할을 존재감 있게 남겨준다.
말하지 않으면,
그건 그냥 ‘팀 전체의 운 좋은 결과’일 뿐이다.
“현재 80% 진행됐습니다.
초기에 일정 충돌 우려가 있었는데,
○○팀과 사전 조율해서 무리 없이 넘어갔습니다.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리스크 관리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다 했습니다!’가 아니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떤 판단을 했는지
조직이 참고할 만한 교훈은 뭔지
→ 이걸 하나라도 담으면 존재감이 남는다.
문제가 아직 진행 중일 땐
민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현재 60% 진행 중이고,
테스트 단계에서 오류 발생했습니다.
원인은 ○○로 추정되고,
내일까지 테스트 완료 후 결과 공유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꼭 덧붙인다.
“혹시 제가 놓친 시각이나,
추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이 말이 리더의 통찰을 끌어내고,
무언의 합의까지 만들어준다.
→ 이후 문제가 커져도,
방향을 함께 확인한 기록이 남는 것이다.
자료 맨 위에 조용히 이런 체크박스를 넣기 시작했다:
☐ Help Needed
☐ Decision Needed
☐ Information Only
☐ Lesson Learned
예전엔 무조건 Information Only만 찍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움이 필요할 땐 Help,
결정을 받아야 할 땐 Decision에 체크해서 올린다.
“보고 안 하면, 기름 없이 엔진 돌리는 거다.”
민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뼛속까지 안다.
팀장은 도와줄 기회가 있으면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신호를 안 보내면,
그 기회조차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행보고는 단순한 상태 공유가 아니다.
문제를 꺼내는 용기,
해결 의지를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무대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는
그냥 조용한 배경음일 뿐이다.
“순조롭습니다”가 아니라
“그래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해야 한다.
이제 민수는 매 회의가 무섭지 않다.
보고는 그저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의 일하는 방식을 설계하고,
증명하고, 인식시키는 기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