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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MZ후배가 진짜 따르고 싶은 상사는 따로있다

인간관계 - 하급자와의 관계: 뛰어난 후배

by 마찌

벤을 처음 본 건,

내가 미국으로 이직한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트랙 프로그램이라는 제도가 있다.

새로 뽑힌 신입사원이 여러 팀을 6개월씩 돌며 경험해보고,

마지막에 원하는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대학으로 치면 자율전공 같은 셈이다.


당시 내가 있던 시험팀은 평균 연차가 낮은 팀이었다.

80%가 1~3년차.

비교적 젊고 역동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벤이라는 친구는, 첫인상부터 참 독특했다.


까까머리에 수북한 턱수염, 말도 많고 유머는 영 없다.

무리 안에서도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전형적인 ‘공돌이’ 이미지랄까.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도 혼자이거나,

동년배 애들보다는

나처럼 애매한 중간 연차의 사람들 옆에

끼어 앉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마지막에 우리 팀을 선택했다고 했을 때,

다들 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어쩌면 그나마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팀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내가 맡은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벤은 특이한 친구였다.

호기심은 많은데, 눈치는 없었다.


예를 들어 ‘Footload 테스트’처럼,

20년 전부터 내려온 시험 항목이 있다.

라인에서 조립 중 실수로

우리 모듈을 밟는 상황을 가정한 테스트인데,

벤이 물었다.

“왜 900N이죠?”

“왜 면적은 4cm × 4cm인가요?”
“진짜 작업자가 밟는 일이 있긴 한가요?”

그 모든 질문들에 나는 결국

“그건 나도 잘 몰라”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10년차 리드가 말이다.

짜증이 밀려왔다.

‘얘는 왜 이렇게 별 거 아닌 걸 집요하게 파고들지?’


그런데 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시험, 우리 모듈에 진짜 해당될까요?

10kg이 넘어서 규정상 리프트를 쓸 텐데,

차량 조립시간을 고려하면

리프트를 바닥부터 들어올리면 너무 오래 걸려서

모듈을 그냥 바닥에 놓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요.”


순간, ‘어? 말 되는데?’ 싶었지만,

그 감정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는 말했다.


“내일모레 회의 전에 각 공장 조립 담당자들과 확인해서 말씀드릴게요.”

…어? 어… 어.


수백가지 테스트를 검토하느라,

요즘 핫한 시험들에 치중하느라,

20년간 해오던 이 시험의 기준과 유래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치던 이런 사소한 것들조차

완전히 다시 생각하고 검증한다는건

스케일이 다른 사고였다.


보통은 우리 연차는 가장 급한 테스트 내용부터 검증하느라

의례 레거시는 건들이지 않거나

반대로 벤처럼 연차가 낮은 친구들은

빨리 전체적인 큰그림을 익히는데 조급함이 들어

하나하나의 디테일에는 신경쓰지 않으니까.


이 친구는 일이 ‘일사천리’였다.

큰그림도 그리면서,

시험마다 기준이 왜 생겼는지 직접 찾아보고,

장비를 예약하고, 실험해보고, 정리해서 다시 가져왔다.


내가 어렸을땐? 이메일 몇 통 정도.

문서 몇 개. 논의 몇 번.

나는 내가 스스로 찾아보며

일하는 타입이라 생각했지만,

스스로 묻고 필요하면

벤은 ‘직접 실험’까지 했다.

그 깊이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에선 승승장구하고,

미국에서도 어느정도 자리잡은

10년차의 내가,

몇 년 안에 따라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나는 그처럼 할 수 없다는 것.


프로젝트 리드로서 쉴 새 없이 회의에 불려 다니고,

가정이 있어 늦게까지 남기도 어려운 내가,

그처럼 혼자 공부하고 실험할 시간은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떠올랐다.


J차장.


그는 엘리트였다.

미국에서 주재원을 하고 돌아와 막 차장을 단 시절,

나는 신입사원으로 그가 부팀장으로 있는 신생팀에 배정되었다.

본인이 공부한 걸 팀 세미나로 풀어내고,

모두에게 발표 기회를 줬다.

팀세미나는 항상 질문이 쏟아졌고,

자료 준비는 늘 자율야근이었다.


한 번은 회식 때 물었다.

“차장님, 이렇게 우리 다 알려주면 차장님 경쟁력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마찌야, 내가 뒤처지면 뒤처지는 거지. 대신, 나도 계속 공부하잖아.”

그 순간이 생각났다.


그래서였을까.

어림없다는걸 알지만, 나도 동경하던 J차장이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을까.


벤에게 묻는 건 알려줬고,

자료 달라면 줬고, 잘해오면 칭찬도 했다.

위기감은 여전했다. 자존심도 무너졌다.
하지만 스스로 되뇌었다.


“리드는 지식 우위가 아니라 프로젝트 완수를 책임지는 사람이지.”


벤은 9개월쯤 지나 내 ‘밑천’을 다 파악한 듯했다.

이제는 깊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나를 존중해줬다.

내가 잘 모르면, 무안하지 않게 배려했고,

한국 협력사와의 열띈 논쟁에서 성과를 내면,

우러러 보는 시늉도 해주었다.


고마웠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미안했다.

나보다 훨씬 잘하는 후배가

나를 아직도 깍듯하게 선배로 대우해주다니.


마치 고속도로에서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차에게

추월 할수있게 비켜주는 것처럼

한번 마음먹으니 그 뒤는 더 쉬웠다.


그 후,

나는 벤에게 성과 발표 기회를 만들어 줬고,

이례적으로 2년차임에도 단독 프로젝트도 맡겼다.

당연하게도, 그는 깔끔히 해냈다.


나와 오랫동안 같이 일한 팀장은 나에게 ‘리드를 잘했다’고 했지만,

나도, 팀장도, 말은 하지 않아도 같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경쟁부서로 통합되면서

평소에도 우리팀을 달갑지 않아하던 새로운 실장(적장)이 보기에는

2년차도 잘하는 쉬운업무를 하는 팀에,

나역시 그 2년차에 밀리는 리드로 보였을테니.


그렇게 팀은

3년 후에 시뮬레이션 팀으로 통합될 예정이 발표되었고,

곧 다가오던 팀장이 은퇴하는 날

나는 벤과 함께 각기 다른 팀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새로운 팀에서,


내가 벤이 되었다.


완전히 다른 부문의 새 팀에서,

나는 모든 걸 다시 배웠다.

자동화 툴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고,

팀원들은 나를 반 존경, 반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벤이 그랬듯, 나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J차장도, 벤도,
지금의 나에게 참 고마운 선물이었다.

< 벤, 나, (다른팀원) 2022년 어느 맥주집에서>


#후배 #실무 #자기계발 #그릇이 작은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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