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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Ah Jul 21. 2022

아직까지는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하자

Dyspnea#185



0124

편의점 관찰일지 5인가. 유흥가다 보니 모텔이 도처에 있고, 콘돔을 사 가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보통 콘돔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통일된 행동양식을 보인다. 우선 뭐 살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편의점을 한 바퀴 돈다. 콘돔을 집는다. 그다음 이걸 사러 온 게 아니라는 것처럼 다시 한 바퀴를 돈다. 콘돔만 산다. 부끄러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당당하게 사는 문화가 장착되기를 바라본다. 2. 나는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를 피는데 이 담배 피우는 사람이 정말 없다. 



0221

근무 일지. 1. 담배가 첫 빵꾸가 났다. 젠장.. 근데 -는 우리의 주머니에서 나가면서 왜 +는 우리에게 추가 보상이 아니라 점주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걸까? 둘 다 같은 계산 실수에서 오는 건데. 2. 편의점에서 인센을 걸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그리고 그게 있다면 조금 더 책임지는 방법이 될까? 



0320

공세시 이십 분. 어느새 하루 근무의 절반이 넘었다. 나는 지금 츠타야 서점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빈지노는 잠이 든 자에게는 내일이 오지만 난 내가 먼저 내일을 본다고 이야기했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는 내게는 내일이 오는 게 아니라 내일을 보는 것이 되는 것일까. 



0339

개인적으로 강호동보다는 유재석의 진행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 오버하고 시끄러운 것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강호동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펑펑 흘린 적이 있는데, 이를 기록해두지 않으면 역시 까먹을 것 같아 생각난 김에 글로 써둔다. 강호동은 운동선수로서 중요한 능력 중에 하나가 바로 캡처 능력이라고 했다. 나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게 모방 능력인데 그 말을 듣고 꽤 큰 위안이 되었다. 



0509

면접을 봤던 회사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정말 그 회사를, 그 직무를 원했던 것이 맞는가? 커뮤니티 매니저로서 그 회사가 잘 나간다고 해서- 그런 외부의 평판 때문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정말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니라. 



0519

예전에는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 좋은지, 무엇이 좋은지. 요즘에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좋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많은 말이 필요 없다. 그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다. 



0520

반대로 별로인 것은 말하지 않아도 별로인 게 느껴진다. 다만 시간이 지나 보니 별로인 것을 조목조목 따져 별로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진다. 그렇게 해봤자 서로 피곤해진다. 상대도 원하지 않고, 별로인 점을 이야기해도 상처만 받는다. 그렇다고 괜찮았어요. 좋았어요라고 말은 차마 못 하겠기에 그냥 그랬다- 정도로 에둘러서만 표현한다. 그 표현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게 돼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나의 어쩔 수 없는 지금의 최선이다. 나이가 들면 또 그런 별로였던 것들의 좋은 부분만 보는 눈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대신 정말 좋았던 것은 정말 좋았다고 칭찬한다. 그게 지금의 나다. 어쩔 수 없는. 



0527

서점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다시 또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나를 조금 더 믿어주는 것 같다. 그래야 추진할 수 있다. 그 마음은 매우 중요하다. 



0533

주말에만 오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용직으로 보이는 분이 늘 비슷한 시간에 온다. 대화를 해본 것은 아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행색으로 미루어보았을 때는 그러하다. 그가 사는 품목은 언제나 같다. 참이슬 오리지널 하나와 물 700ml짜리 하나. 나는 보통 퇴근 30분 전에 청소를 시작하는 데 바깥을 쓸러 나가면 바로 옆에 있는 술집, 그 술집 앞에 대기하는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긴 의자에 그분은 늘 자고 있다. 옆에는 비워진 술병과 비워진 물병만이 있다. 그의 고된 하루를 유지해 주는 것은 술과 물 둘 뿐인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곳도, 지친 몸을 쉬게 해 줄 편한 집도 없는 그의 삶에 대해서 잠깐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편하게 잠들어있다. 이곳이 어디든, 오늘 하루가 어떠하였든, 그가 살아온 삶이 어땠든지 간에. 



0538

마켓컬리에서 다스나 피킹을 오래 했을 때나 지금 편의점에서 일하면서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굳이 해봐야 하나?라는 물음에는 답을 내리기 조금 어렵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가장 큰 것 혹은 실망하는 것 중 하나가 서민 혹은 서민의 삶을 이렇게 모르나?이지 않나. 정치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금 나는 서민의 삶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이니- 그것 또한 하나의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김영하가 실패는 작가에게 좋은 경험-이라는 이야기나 찰스 디킨스가 밤 산책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이유이기도 하고. 물론 이 삶의 형태가 오랫동안 유지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직까지는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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