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걷고 싶은 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부 사람이 돌아오는 도시를 만드는 법

by 마나월드ManaWorld
Google_AI_Studio_2025-09-30T10_24_35.511Z.png 3장 걷고 싶은 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TND와 '네이버후드'의 역할


2019년 봄, 양산 물금신도시. 도시계획 전문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가 정말 신도시 맞아요?"


그의 놀라움은 당연했다. 한국의 여느 신도시와 달랐으니까.


보통 신도시라면 똑같은 아파트 단지, 넓은 도로,

차 없으면 못 사는 구조, 저녁이면 죽는 상권이 떠오른다.


하지만 양산 물금은 달랐다.

걸어서 10분 내 모든 것이 있고, 좁은 골목과 작은 광장이 있으며,

사람이 걷는 거리에 밤 10시까지 북적이는 카페거리가 있었다.


비밀은 간단했다.


이곳은 TOD(대중교통 중심 개발)가 아닌 TND(전통적 근린 개발)로 설계됐다.

(일부 상황·인물·대사는 재구성되었습니다.)


1부 3장. 걷고 싶은 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TND와 '네이버후드'의 역할


1. TND란 무엇인가?

Traditional Neighborhood Development. 직역하면 '전통적 근린 개발'.


하지만 오해하지 마라. '전통적'이라고 해서 구식이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형 도시 모델이다.


TND의 핵심은 이거다.


걸어서 5분.


집에서 카페까지, 집에서 공원까지,

집에서 학교까지 모두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리고 1층은 상점, 2-3층은 사무실,

4층 이상은 주거로 섞어놓는다.


건물 높이는 4-6층으로 제한하고,

도로는 보행자 우선으로 좁게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심이다.

광장이나 공원 같은 명확한 중심이 있고, 그 주변으로 생활이 펼쳐진다.


이게 왜 미래형인가? 사람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차가 아니라.


2. 한국 도시의 비극: TOD의 함정

1990년대, 한국은 신도시 건설에 열을 올렸다.

모델은 TOD(Transit-Oriented Development).


지하철역 중심으로 고밀도 개발을 하고,

상업과 업무를 집중시키며,

자동차와 대중교통을 함께 고려한다.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극단적으로 갔다는 거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바로 그거다. 역세권.


분당 정자역을 보라. 역 주변엔 초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그런데 도보 10분만 벗어나면?


아파트만 있다.

저녁 7시가 되면 역 주변만 붐비고 나머지는 베드타운이 된다.


결과는 뻔하다. 출퇴근 지옥, 주말 엑소더스, 커뮤니티 부재, 정체성 없음.


우리는 효율성에 미쳐서 삶을 잊어버렸다.


3. 네이버후드의 재발견

Neighborhood. 단순히 '동네'로 번역하면 안 된다.

네이버후드의 진짜 의미는 "서로 알고, 만나고, 돕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한국어로는 '마을'이 가장 가깝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마을을 잃어버렸나?


1960년대 서울 북아현동을 기억하는 사람의 증언이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놀았어요.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았죠.

동네 어귀 구멍가게가 사랑방이었고요."


2020년대 북아현동은 어떤가?

골목은 주차장이 됐고, 옆집 얼굴도 모르며, 구멍가게는 편의점이 됐다.


무엇이 네이버후드를 죽였나?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도시계획이다.


4. 성안길의 네이버후드: 영화관이 만든 중심

성안길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롯데시네마.


"영화관이 뭐가 특별해?"라고 묻는다면, 위치를 보라고 답하겠다.


일반적인 영화관은 쇼핑몰 최상층에 있다.

접근성이 떨어지고, 영화만 보고 떠난다.


하지만 성안길 영화관은 거리 한복판에 있다.

1층에 출입구가 있고, 만남의 장소가 된다.


금요일 저녁 7시, 성안길의 풍경을 그려보자.

고등학생 커플이 영화를 본다. 영화가 끝나면 팝콘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

거리 공연을 구경하고, 떡볶이를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노래방으로 간다.


영화관 하나가 만든 연쇄반응이다.

일일 유동인구 수천 명, 평균 체류시간 3-4시간, 연계 소비의 대폭 증가.


영화관은 단순한 상업시설이 아니었다. 네이버후드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2015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5. 메르스 그리고 부활

2015년 메르스 사태. 성안길이 텅 비었다. 상인들은 울상이었고, 거리는 죽어갔다.

그때 영화관이 나섰다.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롯데시네마의 제안으로 거리공연이 시작됐다.

처음엔 재능기부였다. 지역 댄스학원 학생들이 나왔고, 동아리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성안길 상인회 유시송 기획이사의 증언:

"처음엔 반신반의했죠.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주말이면 거리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결과는 놀라웠다.

주말 유동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상권 매출이 눈에 띄게 상승했으며,

텅 비어있던 상가들이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성과를 본 한국관광공사가 나섰다. 대규모 예산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추가 지원이 이어졌다.

청주시도 함께했다.


영화관이 앵커(anchor)가 되어 전체 상권을 살렸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부 상황·인물·대사는 재구성되었습니다.)

(상품학연구 2016년6월 - 도심 축제의 거리문화공연이 지역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

‘청주시 성안길 거리문화공연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중심으로 - 박하늘, 남문희, 김주호, 정강환)


6. 양산 디자인공원: 계획된 네이버후드의 명과 암

양산시와 LH는 야심 찬 실험을 시작했다.


"TND 방식으로 신도시를 만들면 어떨까?"


18만㎡의 부지에 101억 원을 투입한,

양산시와 LH의 역작 '디자인공원' 프로젝트였다.


이 공원은 일반 공원과 달랐다.

고저차를 활용한 입체적인 설계 위로 산책로와 자전거길,

물놀이터와 야외공연장이 어우러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24시간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새벽엔 러너들이,

오전엔 유모차 부대가,

저녁엔 산책하는 가족들이 공원을 가득 메웠다.

완벽하게 계획된 TND의 성공처럼 보였다.


그 활기는 공원 가장자리로 흘러넘쳤다.

공원을 따라 생겨난 20개가 넘는 카페와 레스토랑, 공방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상권의 중심에는 CGV 영화관이 든든한 앵커(Anchor) 역할을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2019년까지만 해도,

공원에서 시작된 활기가 상권으로 이어지는 이상적인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7. 붕괴, 그리고 교훈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은 영화관의 관객이 줄자, 상권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CGV 인근 상가의 공실이 급격히 늘어나며 상인들은 "벼랑 끝에 섰다"고 호소했다.


앵커가 무너지자 연쇄반응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관 폐쇄 → 유동인구 급감 → 카페 매출 반토막 → 하나둘 폐업 → 공실 증가 →

거리 침체 → 더 많은 폐업.


사실, 위기는 예고되어 있었다. 한편에서는 신도시 계획 당시 상업 부지가 과도하게 공급되어,

"코로나 이전부터 장기 침체"가 시작되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코로나라는 외부 충격은 약한 고리를 끊어버린 결정타였을 뿐이다.


2025년 현재. 공원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라. '임대 문의' 전단지가 나붙은 텅 빈 상가들.

8년째 주인을 찾지 못해 텅 비어버린 복합상가. 활기찬 공원과 을씨년스러운 거리의 섬뜩한 대비.


이것이 바로 하드웨어의 한계다.


아무리 완벽한 공간(공원)을 만들어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계와 소비의 생태계가 외부 충격과 구조적 문제 앞에 무너지면,

도시는 다시 공허해진다.


(일부 상황·인물·대사는 재구성되었습니다.)

(양산신문, 2021 / 국제신문, 2023 / 부산일보, 2023)


8. 실패 사례: 천안역의 교훈

천안역 앞은 완벽한 TOD 조건을 갖췄다.

KTX 정차역, 버스 터미널 인접, 일일 유동인구 수만 명.


그런데 쇠퇴했다. 왜?


천안역 주변 상인 박모 씨(58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로가 너무 넓어요. 왕복 8차선이에요.

건너편 가려면 신호 대기만 3분이죠. 누가 건너겠어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하상가는 지상과 연결이 안 됐고,

건물은 낡고 정리가 안 됐으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체인점만 즐비했다.


천안만의 특색은 없었다. 사람이 왜소해지는 공간이었다.


천안시 역시 구도심을 살리기 위해 '크리스마스 축제'를 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18년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는 실패의 원인을 명확히 보여준다.


상인들은 축제 프로그램이 "

단조롭고 형식적(4.00/5.00)"이라고 가장 크게 불평했으며,

"상인과 협조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홍보가 미흡해 축제를 하는지도 몰랐다"고 비판했다.


결국 축제는 상권 활성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으며(매출 증대 효과 2.74/5.00),


상인들은 "일회성 행사는 의미 없어요. 공간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무슨 소용이에요?"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돈은 돈대로 썼지만, 관계를 만드는 데는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다.


(일부 상황·인물·대사는 재구성되었습니다.)

(한국철도학회 2019 - 이재용, 이광옥

천안 구도심 도시재생을 위한 축제행사가 천안역 주변 지역상권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


9. TND 성공의 조건

그래서 정리하면, 성공하는 TND의 조건은 무엇인가? (DPZ Lexicon, 2014)


첫째, 휴먼 스케일이다. 건물은 4-6층, 도로는 2차선 이내, 블록은 50-100m.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는 크기다.


둘째, 중심 앵커다. 성안길엔 영화관이, 양산엔 디자인공원이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필요하다.


셋째, 프로그램이다. 정기적 활동, 다양한 연령대, 누구나 참여 가능한 것. 빈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을 만든다.


넷째, 경계와 정체성이다. 명확한 시작과 끝, 고유한 특징, 기억에 남는 스토리텔링. 어디에나 있는 곳이 아니라 여기만의 곳을 만든다.


다섯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위기 대응력이다. 외부 충격에 대한 준비, 다양한 수익 모델, 무엇보다 커뮤니티의 결속력. 양산이 놓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10. 임시 TND: 차 없는 거리의 가능성

"우리 동네는 이미 다 개발됐는데..."라고 한탄하는가?


그렇다면 임시 TND를 만들어라.


서울시가 시작한 차 없는 거리가 좋은 예다.

주말 특정 시간에 차량을 통제하고 보행자 천국을 만든다.

효과는 즉각적일 수 있다. 시민 참여가 늘고, 상권 매출이 상승한다.

(Seoul Solution-서울정책아카이브, 2014-2015)


성안길도 토요일 저녁 일부 구간을 임시 보행전용으로 전환하고 거리 공연을 연다.

작은 변화가 큰 효과를 만든다.


핵심은 이거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11. 작은 변화의 시작

양산을 보라. 완벽한 하드웨어도 무너질 수 있다.

성안길을 보라. 죽어가던 거리도 살아날 수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이다. 더 정확히는 사람들의 관계다.


TND의 핵심은 보행도, 네이버후드도 아니다.

지속가능한 관계다.


그리고 관계는 위기 앞에서 시험받는다.

성안길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양산은 위기에 무너졌다.


당신의 동네는 어떤가? 위기가 왔을 때 함께 극복할 관계가 있는가?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라. 작은 모임부터, 작은 인사부터. 도시의 미래는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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