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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an 04. 2023

불안과 희망의 힘으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인가. 관객으로서 나는 재미, 의미, 감동 중 하나라도 제대로 전해주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인식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한꺼번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내가 겪은 재미, 의미, 감동을 중심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먼저 재미. 모든 이야기가 시작과 끝에 놓인 두 점을 잇는 구조로 되어 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끝점으로 향하는 과정일 테다. ‘어디로’ 향하는지보다 ‘어떻게’ 가는지. 늘 신선한 전개를 기대하지만 정말로 새롭다고 느낄만한 영화는 드물다. 이 영화는 드문 편에 속하리라. 다중우주라는 익숙한 소재와 가족의 화해라는 평범한 결론을 선택한 이 영화의 차별점은 전개에 있었으므로. 영화는 현실에 지친 인물을 지켜보다, 그 인물이 세상을 구할 것처럼 보여주다, 곧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러더니 결말에선 ‘영화다운 감동’을 내민다. 고유한 전개로 신선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이다.

     

독창적인 표현도 엄지를 치켜들게 했다. 예컨대 ‘핫도그 같은 손’이나 다른 세계관에서 내가 익힌 능력을 불러오기 위해 벌이는 ‘엉뚱한 행동’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껏 웃었다. 돌이 대화하는 장면은 거의 넋 놓고 보았다. 무한한 상상을 근성 있게 전달하는, 이 기술과 의지의 발산 앞에서 나는 영화란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소 정신없고 다채로운 화면 전환조차 의도한 연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 과장한다면, 이 작품은 인간의 상상력도 결국 유한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에 관한 반론처럼 느껴진다. 과연, ‘상상은 자유’, ‘표현은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의미.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푸념에 머물던 이 가정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것도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이 지금보다 더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좌절할 수밖에. 그러나 영화는 ‘하지 않은 선택’을 긍정할 이유가 없다. 지금 여기, 우리가 만난 주인공의 현실에 주목해야 하므로. 그래서 ‘조이’(스테파니 수)의 사정을 보여준다. 조이는 모든 선택의 결과를 아는 인물. 선택이 가져올 모든 결과를 알면 우리가 느낄 감정은 허무밖에 없을 것이다. ‘헛되게 느껴지면’(虛) ‘아무것도 남지 않은’(無) 곳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 나는 조이를 보며 실감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결과를 알지 못한다는 공평함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기 때문에 상상하고, 그 상상에 담긴 불안과 희망의 힘으로 내일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무지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삶에 관한 무지는 의욕이 되기도 하니까. 영화 속 ‘에블린’(양자경)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서 주목할만하다. 그는 다른 세계 속 성공한 자신으로 살아갈 기회를 버리고 ‘실패한’ 현실에 머문다. 체념이나 단념의 태도가 아니라 나의 삶을 인정하고 책임지겠다는 다짐으로. 불확실하지만 내가 살아온, 부족하지만 내가 얻고 가꾸어 온 ‘내 삶’을 선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영화에서 감동한 부분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일단 두 장면을 보자. 장면 하나. 서툴고 연약하며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던 ‘웨이먼드’(키 호이 콴)는 최후의 전투 앞에서 고백한다. 자신은 평생 ‘친절함’이라는 방식으로 세상과 싸워왔다고. 장면 둘. 전능한 전사가 된 에블린도 마지막 위기를 ‘강함’ 대신 ‘친절함’으로 극복한다. 자신을 가로막는 인물에게 폭력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가진 소박한 욕망을 채워준 것이다. 그러자 다툼이 멈추고 길이 열린다. ‘친절한 태도가 분란을 잠재운다.’ 영화가 전한 이 메시지에 나는 감동했다. 친절함이 무용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모든 생물에게는 저마다 생존 방식이 있고, 그 가짓수는 종(種)의 수만큼 다양하다. 단위를 인간으로 좁혀봐도 그렇다. 수많은 방식 중 우리가 본 ‘연약한’ 웨이먼드의 싸움(생존) 방식이 그의 선택인지, 운명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말한 ‘친절함’이 ‘회피’로 들리지 않았다. ‘최선’으로 들렸다. 에블린도 이에 동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생존 방식을 추구하길 바란다. 나에게 친절할 때 남에게도 친절할 수 있다. 나아가 ‘실패한 나’에게 관대한 나는, ‘실패한 당신’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실패한 서로에게 관대해지는 것은 왜 중요할까. 나는 우리 사회가 두 번째 실패를 경험하기 어려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첫 실패에 귀속된 실패의 여정, 그것이 곧 ‘인생’이 되는 경우가 너무 흔하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관대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도 되는 사회이길 나는 바란다. 새해는 밝았고, 올 한 해 우리 앞에 어떤 실패와 성공이 놓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은 모른다. 다만 재미와 의미와 감동을 겪으며 한 해를 보내는 방식은 얼핏 알 것도 같다. 상상하고 표현하기. 인정하며 나아가기. 단, 친절한 방식으로. 나에게나 남에게나.



(2023. 01. 04.)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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