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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Apr 21. 2023

다음 유진

영화 《다음 소희》

다음 소희는 없어야 한다


     

모든 영화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담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메시지를 넘어 목소리로 다가오는 영화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내게는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2023)가 그랬다. 가장 명료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이러했다. “다음 소희는 없어야 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소희’(김시은)가 겪은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 괴롭지만, 되짚어 보겠다. 요약의 폭력성과 납작한 관점에 감히 용서를 구하며.

      

2016년, 특성화고에 다니는 소희는 대기업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간다. 그가 배정된 곳은 ‘세이브팀.’ 그곳에서 그는 (인터넷, IPTV 등의) 서비스 해지를 방어하는 업무를 한다. 현업 근무자조차도 힘들어하는 일을 미성년이자 신입인 그가 떠맡은 것이다. 연일 고객의 폭언과 성희롱에 시달리면서도 소희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이 죽는다. 해당 콜센터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사측은 소희를 비롯한 직원들에게 잔혹한 요구를 한다. 팀장이 유서에 남긴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서명을 하란다. 학생 신분으로, 그러니까 교육 과정으로 ‘현장 실습’ 중인 소희는 고민에 빠진다. 마지막까지 서명을 거부하다가 본사 직원의 강요로 인해 서명한다. 이후 소희의 태도는 달라진다. 실적을 높이는 데 혈안이 된다. 아이가 세상을 떠나서 인터넷을 해지하겠다는 고객에게도 위약금을 운운하며 ‘해지 방어’에 힘쓴다. 그리고 실적 1등이 된다. 

     

새로운 팀장은 소희의 변화에 반색한다. 주변에선 소희가 높여 놓은 기준 때문에 힘들어하지만, 소희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들의 방식대로. 그런데 실적 압박에 시달리며 야근을 반복한 결과는 참담했다.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일을 시킬 때는 숙련된 노동자가 되기를 요구하고, 보수를 줄 때는 학생이라는 신분을 악용한 사측의 태도에 소희는 분노한다. 급기야 새로운 팀장과 부딪치고 만다. 3일 무급 휴가라는 징계를 받은 소희는 방황한다.

      

부모님은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소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친구들은 저마다 주어진 생존의 무게에 버거워한다. 선생님은 소희가 겪는 일에 무지하다. 사측처럼 실적에 매몰돼 소희에게 출근을 강요할 뿐. 소희는 고립된다. 이윽고 그는 한 줄기 빛에 이끌려 호수로 걸어 들어간다. 소희가 떠나자 모두가 그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려 든다. 언제나 그렇듯 누구도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소희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다음 소희’가 없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만 그 말을 그대로 옮겨 적는 일을 누군가는 무용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뚜렷한 해답이나 실천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할 분도 있겠다. 내가 그런 의견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 비관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의심스럽더라도 “‘다음 소희’가 없어야 한다”라는 말은 반복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비관만으로는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 또한 세상과 현실은 원래 냉정하니 어쩔 수 없다고 자주 말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세상의 냉정이 유지되는 데 내가 견지한 냉담의 태도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현실에 일조한 사람이다. 이렇게 믿는 이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무엇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 어느 쪽이든 바뀌어야만 한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테다.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촉구할 힘과 의지를 가진 정치인에게 투표하거나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런 영화에 관심을 두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리라. 관심과 목소리가 곧 변화의 불씨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요구나 필요보다 훨씬 느리게 변한다. 느리지만 변한다. 얼마 전, 직업교육훈련촉지법 일부 개정안이 의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특성화고에 다니며 현장 실습을 나가는 학생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규제가 생긴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여전히 노동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더 오랜 노동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전에, 그 바탕에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노동이라는 바퀴라고 해도, 가장 높고 안온한 객실에 앉은 이들은 달리는 열차의 바퀴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는 사람만 걱정한다. 아는 사람만 미래를 본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세계의 다음은 없다. 


         

다음 유진이 되어야 한다


     

이제 이 글의 제목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유진’(배두나)에 관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유진은 이질적인 존재이다. 실재한 사건에, 필요한 인물을 가담시킨 것처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전사가 나오지 않지만 올곧은 사람처럼 보이는 유진은, 행동으로써 남겨진 사람들의 몫을 말한다. 마치 영화가 내는 목소리의 주인인 것처럼. 그렇다고 그가 기운 넘치고 적극적인 인물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순간, 물러서지 않는 얼굴을 가졌을 뿐.

      

여러 작품에서 배우 배두나가 보여준 ‘어른의 얼굴’과 ‘들여다보는 눈빛’을 유진도 가지고 있었다. 유진은 그러한 얼굴과 눈빛으로 ‘다음 소희들’을 차례로 만난다. 그들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힘들 땐 연락해도 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실적, 취업률, 힘, 책임, 소관 같은 단어가 사람보다 우선이라고 믿는 어른들에게 일갈한다. 아이들을 그런 곳에 보내지 말아야 했다고. 다른 근거를 덧붙인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진실을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다음 소희’를 위해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세상은 변한다고 했는데, 변화를 촉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변하는 동안의 일일 것이다. 변하는 동안에도 ‘소희들’은 고통받는다. 이를 외면한다면 또다시 ‘다음 소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고통을 없애줄 절대자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다. 간신히, 소통할 어른 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 아이들을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존재가 있다면 결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유진이 될 것인가. 먼 곳에서 찾을 필요는 없겠다. 이미 영화가 유진을 통해 말해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엔 그런 어른이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무력하다고 믿는 선량한 어른들에게, 유진이 존재한다고, ‘다음 소희’를 위해 누구라도 유진이 되어야 한다고, 당신도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이것을 믿는 까닭은 유진이라는 인물을 상상하고, 쓰고, 연기하는 사람들을 봤기 때문이다. 그것만 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진은 공감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당한 일과 그 일을 함부로 말하는 이 앞에서 분노하는 사람이며 ‘다음 소희들’에게 작지만 커다란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유진이 그랬듯 그처럼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은 힘겹다. 유진도 힘겨울 때 유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유진은 곳곳에 존재해야 한다. 나 역시, 유진이 되어야 한다. 나보다 먼저 유진이 된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정한 이 세상에 다음이 존재하려면 우리는 모두 ‘다음 유진’이 되어야만 하리라.


(2023. 04. 21.)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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