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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y 04. 2023

극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계속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 《슬픔이여 안녕》

슬픔은 극복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인간에게 슬픔은, 만남만 있고 작별은 없는 감정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극복이 아니라 동행의 대상이리라. 인정한다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슬픔을 마주칠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소설을 읽기도 한다. 질문하기 위해 또는 확인하기 위해. 슬픔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왜 소설인가. 소설만큼 인간의 심연을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담아낸 형식은 드물다고 믿어서다. 심지어 이 체험은 안전하기까지 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새삼 꺼낸 이유도 위와 같다.

     

알려진 대로 제목에 쓰인 ‘안녕’은 헤어질 때가 아니라 만날 때 하는 인사이다. 주인공 ‘세실’이 만난 슬픔은 무엇이던가. 오래된 작품인 만큼 기억이 희미하다면 세실이 열일곱이 되던 해, 그해 여름 별장으로 함께 가보자. 편의상 다른 인물은 빼고 오직 세 사람(세실, 레몽 그리고 안)으로만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자. 세실은 별장에서 아버지 ‘레몽’과 휴가를 보낸다. 그곳에 ‘안’이 온다. 안은 안정적이며 교양 있는 인물이며, 래몽은 즉흥적이며 방탕한 구석이 있다. 꽤 다른 두 사람은 뜻밖에도 결혼을 약속한다. 세실은 이 사실이 달갑지 않다. 새어머니가 될 안이 자신을 통제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직접적인 것. 그러니까 교정과 명령만이 통제가 아니다.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도 통제가 될 수 있다. 그 시선에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감지될 때, 게다가 시선의 주인이 지극히 올바른 사람으로 보일 때 인간은 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종종 깨닫는다. (저 사람의 시선일 뿐인데도) 나는 어딘가 잘못된 인간이라고. 세실은 안에게서 그러한 시선을 느낀다. 나아가 안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기에 이르자 그는 생경한 제약에 고통을 느낀다.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난 내가 그녀로 인해 비난과 가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고민 끝에 결국, 안을 밀어내기로 결심한다.

     

세실은 주변 인물들을 지휘해 작전을 실행한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계속, 자유를 탐닉하려고. 어렵지 않게 아버지와 안을 갈라서게 만든다. 떠나는 안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내가 공격한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개체였음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으나 늦어버린 듯하다. 세실과 레몽을 등지고 떠나간 길 위에서 안이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안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다. 소설과 함께 책에 담긴 에세이에 사강은 이렇게 썼다. “절망으로 내몰린 안은 운전 중 운전대를 틀어 자살하고 만다.”) 비로소 세실에게 겪어본 적 없는 슬픔이 다가온다. 

    

세실에게 다가온 슬픔의 의미는 무엇일까. 안에 대한 자책과 후회, 그리움이 전부일까. 오늘은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일테면 세상과의 불화를 인정하는 슬픔으로. 이 해석이 설득력을 갖추려면 상징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세실에게 안은, ‘세상의 잣대’ 즉 ‘틀’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보자. 세실은 “틀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 대가로 소중한 것(안)을 잃었고, 세상과 불화하는 슬픔이 찾아왔다. 새로운 틀을 찾아 자신을 억지로 맞춘다면 어떨까. 그땐 자신을 잃는 슬픔이 찾아올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슬픔과 동행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실은 말한다. 슬픔이여, 안녕. (어서 와.)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arte 펴냄, 2023년 3월 31일


마지막으로 소설이 아닌 책의 이야기를 남겨두려고 한다. 이 글에 옮긴 인용문은 전부 2019년 아르테(arte) 출판사가 출간한 책에서 가져왔는데, 얼마 전 같은 출판사에서 새로운 편집과 디자인으로 재출간 되었다. 반세기도 전에 출간된 소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을 보니 작품에 담긴 통찰이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더구나 이 소설은 여전히 현대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인기 드라마들처럼 치정의 소재와 결말에서의 극단적 사고를 그려서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불변한 두 가지 사실 때문인 듯하다. 세실이 그랬듯, 인간은 단 한 번도 슬픔을 극복한 적 없다는 사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2023. 05. 04.)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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