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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y 15. 2023

당신의 고통을 모르므로

윤동주의 시 〈병원〉

 고통에 관한 고통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고통을 부정당하는 고통. 즉 “당신은 아프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것. 듣는 순간 아픈 인간은 한 번 더 고통받는다. 그러나 고통을 증명하는 일에는 또 다른 고통이 따르므로 입을 다문다. 침묵 속에서 혼자 앓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왜 타인의 고통을 부정하는가.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인정과 위로보다는 부정과 외면이 더 편리한 선택임은 알겠다. 이를 절감할 적마다 나는 시로 눈길을 돌린다. 청승인 줄 알면서도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듯이. 희망의 발견이 아니라 고통의 확인을 위해 꺼내 읽는 시가 몇 있다. 그중에는 윤동주의 시도 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려내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어 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그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 〈병원〉* 전문


 알려진 대로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의 원제는 ‘병원’이었다. 그러므로 표제작이 될 수도 있던 이 시를, 우리는 시대적 아픔 또는 젊음의 근원적 고통을 은유한 시로 읽어 왔다. 어떻게 해석하든 전제는 같다. 고통이 보편화된 세계를 그렸다는 것. ‘나’만 아픈 것이 아니고 당신만 아픈 것도 아니다. 각자의 고통이 다르므로 함께 아프지는 못한다. ‘나’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타인에게서 자신의 고통을 발견하고, 그이의 회복을 기원하는데 정작 자신은 고통을 부정당한다. 참느라 앓지도 못한 ‘나’에게 왜 ‘늙은 의사’는 병이 없다고 말하는가. 내가 상상해 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의 고통은 ‘늙은 의사’가 모르는 고통이라서. 너무 다른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둘째, 고통이 일상화된 세상이라서. 그런 세상에서 의사는 치료가 시급한 이들만 환자로 판단하지 않을까. 셋째, 의학적으로 확인할 수 없어서. 이 경우에도 ‘이상 없음’을 말할 수 있으리라. 변호하듯 나열해 본 이 상상들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무의미한 시도는 아닐 것이다. 이 또한 타인을 이해하는 연습으로 여긴다면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모르므로 알려고 노력하는 것과 당신의 고통을 부정하는 이의 사정을 상상하는 것은 다른 길에 있지 않다. 그리고 쉽지 않더라도, 때로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선량한 인간이 되기 위함도,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목적도 아니다. 불가능하더라도 타인을 헤아려 보려는 시도조차 포기하면 나 역시 ‘늙은 의사’가 되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자. 아픈 사람도, 병원도 없는 세상. 침묵 속 고통이 전부인 그곳을. 그곳은 우리 사는 이곳과 정말로 다른가. “아직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나’가 필요하다. ‘늙은 의사’조차 이해를 시도하는 ‘나’. 당신의 고통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나’. 그런 ‘나’가 세상의 표준일 때 비로소 나비가 찾아오고, 살구나무에 바람에 불며, 자신도 모를 아픔의 의미를 함께 고민할 수 있으리라.



(2023. 05. 15.)

(@dltoqur__)

           


* 《윤동주 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스타북스, 2022)에 수록된 작품의 표기에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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