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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Aug 21. 2023

스밈이라는 흐림

김복희의 시 〈씌기〉

나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구나
산 사람을 빌려야겠구나
아무래도 몸보다는 마음이 편하지
스미기에 좋지

가끔 사람들이 묘한 꿈을 꾼다면
그건
마음이 씐 것
마음이 그 사람 모르게 유랑한 것

내가 잘 타고 돌아다닌 다음 놓아준 것

그런데 귀신도 꿈을 다 꾸나

네 꿈이 정말 춥구나
귀신에게 가혹한 온도다

네 마음을 타고 너무 멀리 나왔었나 보다
네 마음을 놓아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네 마음이 이제 너를 어색해한다

김복희 〈씌기〉 전문


새와 새 인간 등 비인간의 목소리로 시를 노래해 온 김복희 시인. 그의 세 번째 시집 《스미기에 좋지》(봄날의책, 2022)에도 비인간이 여럿 나온다. 〈씌기〉의 화자도 인간이 아니다. 귀신이다. 귀신은 “혼자서는 어디도” 가지 못한다. 산 사람의 몸이나 마음을 빌려야 한다. 귀신은 마음을 선택하며 말한다. 몸보다는 마음이 “스미기에 좋지”. 귀신은 안다. 마음은 흰옷처럼 무엇이든 스며들기 좋은 바탕임을. 귀신이 마음에 스며 돌아다니면 마음의 주인이 “묘한 꿈”을 꾼다. 그런데 이번엔 사람의 마음을 빌려 유랑하던 귀신이 꿈을 꾼다.

     

어떤 꿈인가. “귀신에게 가혹한 온도”일 정도로 추운 “네 꿈”이다. 그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춥다는 말에서 외로움 또는 슬픔을 연상하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귀신이 마음을 빌렸던 사람은 지금 외롭거나 슬프다. 둘 다일 수도 있겠다. 꿈마저 추울 만큼 아픈지도 모른다. 사람의 사정이 어떻든 달라지지 않는 사실. 귀신에게 마음이 씐 사람처럼, 귀신의 마음에도 사람이 씌었다는 것. 그것은 귀신에게도 예상 밖의 일인 듯하다. 빌렸을 뿐인데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리다니. 귀신은 곡하지는 않지만 놀랐으리라.

     

사람의 마음을 빌릴 때 귀신은 “잘 타고 돌아다닌 다음 놓아준”다고 했다. 이번에도 “놓아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이제 너의 마음조차 “너를 어색해한다”. 귀신이 말했듯 “네 마음을 타고 너무 멀리” 나온 탓인가. 멀리 나왔다는 것은 출발지(너)에서 꽤 멀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타고 나온 존재(귀신)는 마음과 함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사람보다 귀신을 더 가까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귀신 역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왜? “네 꿈”이 몹시 춥기 때문이리라.

     

따뜻하거나 적당한 온도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놓아주었을지도 모른다. 하필 추운 꿈이라서 귀신은 너의 마음을 놓아주지 못한 것이리라. 타인의 외로움 또는 슬픔 앞에서 인간은 쉽게 등 돌리지 못한다. 바로 돌아서는 사람도 있지만 마음마저 돌아서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이유를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살아오며 보거나 겪었으므로 인정할 뿐. 그것은 인간을 닮은 귀신에게도 해당하는 일인 듯하다.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귀신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서. 귀신의 존재처럼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타인에게 나의 그림자를 내보인 적이 더러 있다. 그때마다 나를 대하는 상대의 태도가 변했다. 매번 좋았던 건 아니다. 갑작스러운 호의나 무시에 불편한 적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멀어진 인연도 많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다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곁을 지켜줄 때. 내가 나의 그림자를 말하고 싶을 때와 말하고 싶지 않을 때를 귀신같이 알아줄 때. 그런 때를 알아준 사람과는 멀어지지 않았다. 몸이 멀어질 때도 마음은 함께였다. 지금,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이 그렇다. 늘 생각한다. 그들의 마음 없이 “나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구나”

     

시를 자주 겪는 분들이라면 이 시를 읽으며 ‘시’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울 것 같다.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은, 잠시간 타자의 마음이 되어 세상을 보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는 읽기든 쓰기든 스밈이며, 스밈이란 체화든 동화든 타자에게 물들어 경계가 흐려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후유증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색하지만, 타자의 마음을 겪고 나면 변화가 생긴다. 이제 내 마음이 이전과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추운 꿈을 겪은 귀신은 어떻게 변했을까. 비로소 인간을 아는 귀신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귀신이라면 언제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2023. 08. 18.)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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