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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Jan 22. 2019

세상에 공짜밥은 없다, 절밥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도 나 자신 한 명은 안다. 하면 안 되는 것을 할 때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나는 한때 부끄러움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주장하고 다니며, 이상형을 부끄러움을 아는 남자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기자들에게는 유무형의 유혹이 올 때가 있다. 일할 때 나는 대단한 특종 기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버렸지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기자만큼은 되고 싶었다. 한마디로 구린 건 안 하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돌렸던 여러 시나리오들과 다르게, 나의 기자생활에서 첫 번째 유혹은 속세와 동떨어진 공간에서 일어났다.  

     

한 사찰에서 화재 대비 소방 모의훈련을 한다며 취재 협조 요청 공문이 왔다. 그즈음 문화재에서 큰 화재가 나면서 목조문화재가 화재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비판을 피하기 위해 소방청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유명 절이 소방서와 합동으로 소방 훈련을 하는 행사를 부랴부랴 마련한 것이다. 사회부 데스크는 스님들이 회색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소화기를 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뉴스에 내보내기에 ‘좋은 그림’이 된다고 판단했다. 나는 지시를 받고 취재를 나갔다.


일은 순조로웠다. 고즈넉한 산사에 화재경보기가 쨍-하게 울리고, 스님들과 사찰 상근직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시나리오대로 착착 움직였다. 이런 식의 모의훈련은 자칫 잘못하면 우스워 보일 수 있어서 최대한 긴박감이 느껴지도록 영상을 찍고 효과음을 적절히 넣어 잘 편집하는 것이 리포트의 성패를 좌우한다. 다행히 스님들은 취재에 적극적이었고, 사찰도 화재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해서 모든 게 협조적이었다. 관공서도 큰 화재 이후에 손 놓고 있지 않다는 걸 보도할 수 있으니 현장에 나와 이것저것 촬영 아이디어도 내고, 까다로운 카메라 기자의 요구사항까지 잘 맞춰주었다.     

 

‘날마다 이런 취재만 하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쉬웠다. 수려한 산사의 정기를 받으며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타사에 ‘물 먹을’ 취재도 아니어서 만사 오케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취재를 마치고 방송사 승합차로 발걸음을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아까 취재를 안내해주던 스님 한 분이 스윽 다가왔다.  


“취재는 잘 됐나요?”

“네, 스님 너무 감사해요! 오늘 저녁에 뉴스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넓은 도포자락 안쪽에서 스윽, 흰 봉투가 나왔다.

“정 기자님, 식사라도 하세요.”

“아닙니다, 스님. 저희 법인카드로 점심 먹으면 되고요, 괜찮아요!”


그런데 이 스님, 윗선의 미션을 받았는지 봉투를 건넨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에요, 스님!”

막무가내로 다가와서 찔러 넣으려고 한다.

“진짜, 진짜, 아니에요!”  

그래도 다가오는 스님. 이를 어쩌나. 강경하다.

스님과 나는 엄숙해야 할 대웅전 앞마당을 옥신각신하며 한 바퀴 뱅뱅 돌았다. 누가 멀리서 보면 어른 둘이서 천진난만하게 술래잡기라도 하는 줄로 알았을 거다. 나는 기어코 봉투를 거절하고 돌아섰지만 스님은 조금 더 밀어붙여야 하는 건가 헷갈린다는 듯 영 찜찜하다는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공짜 밥은 없다는 걸.


거저 주는 걸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그게 당장은 보이지 않을 뿐. 무형의 대가가 실은 더 무섭다. 봉투를 받은 대가는 몇 만 원이 아니라 자존심과 직업적 양심일 수도 있다.


한 번 타협하기 시작하면 점점 타협하지 못할 게 없어지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제 할 일만 잘하고 선을 넘지 않으면 세상에 뻔뻔하게 공짜 밥을 먹을 일도,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먹여 줘야 할 일도 없다. 역시 세상에 쉬운 취재란 건 없구나, 정신이 바짝 들며 그날 오후 스님을 피해 숨이 차게 경내를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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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이 포함된 에세이는 《오늘도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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