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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and Mar 19. 2020

저... 오늘 김장했어요.

내가 듣는 게 다 맞는 게 아니라고!

오늘 오전엔 한국어로 싱가포르 학생들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한 학생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하는 말이,

"선생님, 저 오늘 김장했어요."

인터뷰하러 와서 김장했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한국을 사랑해서 김장까지 하니까 뭔가 잘 봐달라는 말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학생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생각해 보니 바로 아하! '저 오늘 긴장했어요.'라는 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말을 했으니 이 학생이 무슨 맥락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알 리가 있나... 만약 학생이 들어와서 자리에 앉아 덜덜 떠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면? 또는 말을 더듬거리다가 가까스로 이 말을 꺼냈다면? 아마도 난 좀 더 쉽게 '김장했어요'를 '긴장했어요'라고 이해했을 지도 모른다.


맥락이 중요하다.

그래서 맥락이 중요하다. 맥락이 있었다면 나는 처음부터 '김장'이 아니라 '긴장'이라고 들었을 지도 모른다. 언어학, 특히 심리언어학의 실험 방법 중에 Priming이라는 기법이 있다. 쉽게 예를 들어서, 'fish' 다음에 'bank'라는 단어를 보여주면 'bank'를 제방으로 이해하지만, 'money' 다음에 'bank'를 보여주면 은행으로 이해하는 피실험자들이 많이 나오는 그런 실험이다. 중요한 건 우리 눈이 인지하는 시각정보가 뇌에 전달되는 속도가 빨라서 우리 뇌가 인지적으로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시각정보도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실제 실험에는 Prime하는 'fish'나 'money'를 보여 주는 시간은 몇 밀리세컨드 (천분의 몇 초)에 불과한데도 우리가 bank를 보고 첫 번째로 떠올리는 의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실험자는 자기가 fish 나 bank를 봤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우리가 실제로 인지할 수 있는 맥락이라는 것은 이해 활동에서 무척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이 말을 한국 사람이 했다면 전혀 오해의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렇게 단순한 문장은 오해의 가능성이 낮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의사소통의 실패가 없어야 하겠다. 또한 한국 사람들의 발음이 일관적일 것 같지만 그 변이형이 아주 다양하다. 실제 기계를 사용해서 테스트를 해 보면 같은 '어' 발음도 한국 사람 사이에서도 '오'에서 '어'까지 발음의 변이가 다양하다. 따라서 만약 맥락이 없었거나 priming이 발생할만한 상황이라면 한국 사람 사이에서도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


밑도 끝도 없이 'I am a woman'!

요즘 갑자기 스페인 어학 연수에 꽂혀서 이 COVIC-19가 끝나면 내년 여름에 한 달이라도 스페인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Duolingo를 시작했다. 포장은 최신 기술을 이용한 핸드폰 앱에, 음성/발음 인식 기능까지 있는 언어 학습 툴인데, 교육 방법은 우리 중학교 교과서 1과에 있던, 'How are you? - I am fine, thank you. And you?'에서 발전이 하나도 없다. 첫 번째 수업에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 She is a woman. He is a man.' 를 죽도록 연습한다. 이런 말을 우리가 언제 쓴다고... 아무튼 한 문장이라도 스페인어로 말할 수 있다는 흥분에, 어제는 같이 층에서 일하는 스페인 선생님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Yo soy una mujer. (I am a woman.)'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내뱉었다. 이런.... 니나 (스페인 선생님 이름)는 '뭐라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내가 다시 당당하게 'Yo, soy, una, mujer.' 라고 한 단어씩 끊어서 이야기하자 큰 소리로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차! 정신 차리고 보니, 오랫만에 봤는데 보자마자 달려가서 'I am a woman'이라고 말하다니 이 친구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게다가 내가 스페인어를 할 거라는 기대조차 없었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또는 나의 스페인어 발음 때문이었나?)


좀 더 친절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내 마음이 네 마음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하는 말은 이미 내 머리 속에서 처리가 끝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상대방과 공유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에게는 나의 말은 갑자기 툭 던진 밑도 끝도 없는 말일 수도 있다. 좀 더 친절하게 대화하자. 맥락을 만들고, 그로부터 시작한다면 나의 생각을 오해할 확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말을 들을 때에도 맥락을 고려하여 들어보자. 좀 더 즐거운 대화 시간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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