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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디 Oct 20. 2023

스페인에서 카레를 만들어 먹는 법

스페인 현지 마트 조달 편

유럽여행을 가기 전 한국에서 준비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오뚜기에서 파는 대용량 라면수프 1개, 팔도에서 나온 비빔면 소스 5개. 스무 살 초반, 아직 입맛이 유연하다고 생각했을 때의 준비물이었다.


당시의 나는 평소에 파스타 좋아하니까 이번 여행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크림소스, 토마토소스, 오일소스 상관없이 전부 좋아하니까 음식으론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파스타를 종류별로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신나고 설렌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흔히 먹기 힘든 라자냐, 펜네, 랑귀니, 엔젤헤어 등 다양한 종류의 스파게티면을 먹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설렜었다.


파스타를 먹다가 질리면 샐러드나 고기를 구워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권법이었달까. 이미 지방 있는 부위보다 살코기를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삼겹살 부위는 저렴한 부위라서 한국의 반값에 먹을 수 있다는 정보를 메모해 두었다. 평소에 없어서 못 먹는 삼겹살이 반값이라면 무아지경으로 계속 먹을 수 있을 테니 완벽한 계획이었다.

상상과 현실은 전혀 다른 법. 유럽여행 30일 차, 나는 이제 파스타와 고기가 질렸다. 사실은 30일이 되기도 전에 질렸다는 게 맞을 것이다. 가끔 피자와 햄버거로 일탈을 하며 겨우겨우 버텨냈던 '밥'에 대한 욕구가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진성 밥순이였고 피에 마늘이 흐르는 코리아 순수혈족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한 끼 밥을 먹을 수 있을지 고민을 했다. 내가 생각한 한 끼란 쌀을 기본으로 해서 간단한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메인메뉴가 있는 식사를 말했다. 평생을 밥이라고 지어본 것은 쌀을 잘 씻어서 취사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 해본 어리바리 공주님이었던 나와 동생은 밥을 짓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냄비밥을 짓느니 걷다가 나오는 대도시에 있는 중국마트에 들러 햇반을 사느니 마느니로 실랑이를 벌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냄비밥 짓는 게 꽤 간단해 보여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냄비밥을 짓다 실패해서 쌀이 냄비바닥에 누를 것을 생각하면 안 하는 게 맞다 싶었다. 밥 하나 먹자고 몇 날 며칠을 자기 전에 한참을 고민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나름 쌀이 대중적인 재료인데, 어쩌면 한국처럼 즉석밥을 팔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 '스페인 즉석밥'을 검색을 해보니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스페인식 즉석밥을 팔고 있었다. 한국에서 파는 찰기 가득한 즉석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꽤 밥 같은 즉석밥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면을 캡처해서 동생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나 : 밥은 이거 사면 될 듯ㅋㅋ 스페인 햇반이래]
[동생 : ㅇㅇ]


스페인에서 한식 먹기 프로젝트의 첫 단계인 쌀밥 만들기는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그다음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밥과 같이 먹을 간단한 메인메뉴였다. 메인메뉴는 다양하게 고를 수가 있었다. 마트에서 흔하게 파는 소시지를 구워도 되고, 삼겹살에 소금만 구워서 먹어도 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밥을 꽤 쉽게 구해버린 우리 자매는 자체적으로 수급의 난이도를 올려버렸다.


"언니, 다음에 밥살 때 우리 뭐 좀 해 먹자. 요리."

"어? 요리?"

"응, 이왕 밥 먹는 거 든든하게 한 끼 제대로 먹자."


유럽에서 밥으로 한 끼 먹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번 프로젝트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왕 먹는 거 든든하게 한 끼 제대로 먹자'로 바뀌어 벼렸다. 당장 가방에 쥐뿔도 없는 한국여행자가 유럽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음식이 뭐가 있을까? 동생과 나는 마트에 들를 때마다 아무것도 없지만 유럽마트에서 구한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김치찌개? 일단 김치가 없으니까 패스. 된장찌개? 혹시 일본식 된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보류.

짬뽕과 짜장은 애초에 리스트에서 제외.

유럽에 은근 두부는 꽤 있으니까 순두부찌개? 고춧가루가 없으니까 패스.


한참을 그렇게 재료들을 탐색하며 혹시라도 고춧가루를 팔까 싶어서 들러본 향신료 코너에서 제법 익숙한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Curry(카레)'가루가 담긴 통이었다. 유럽에서 발견한 카레가루에 유레카를 외치며 통을 집어 들었다. 후추통만 한 크기의 카레가루는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파는 조미료와 전분이 들어간 카레가루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카레였다. 뭐가 되었든 이 가루를 넣으면 카레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 통을 들고 온갖 호들갑을 떨며 동생에게 희소식을 알렸다.


"야! 박민정. 이거 봐봐. 이거 카레가루야. 카레. 야채 사다가 이거 넣어 먹으면 카레 되지 않을까?"


한참을 카레통을 살펴본 동생은 말했다.


"언니 근데, 이거 맛없으면 어떻게 해?"

"괜찮아. 이건 MSG 안 들어간 거라서 맛없으면 치킨스톡 때려 넣으면 될걸. 일단 사자."


카레가루를 산 뒤에는 일이 쉽게 풀렸다. 카레가루를 산 마트의 쌀코너를 살피니까 스페인식 즉석밥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즉석밥은 2개가 1세트로 판매하고 있어 두 명인 우리 자매에게도 딱이었다. 장바구니에 카레가루를 넣고 즉석밥도 넣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치킨스톡도 하나 담았다. 이제 간단하게 감자, 고기, 피망과 양파를 사기만 하면 되었다. 고기와 야채는 이제 제법 스페인에서 구매를 해 본 터라 문제가 없었다. 야채들은 모양을 보고 사면 되었고, 고기는 'Cerdo' 혹은 돼지그림이 있는 팩을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이왕 먹는 거 든든하게 한 끼 제대로 먹자'프로젝트의 준비는 끝났다.

오뚜기 카레가루로 만든 카레

긴 시간 요리를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사람이 없는 빈 시간대를 노려 알베르게 주방에 방문했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도마와 칼을 꺼냈다. 동생은 사온 채소들을 씻었고 나는 옆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채소들을 다듬었다. 유난히 매운 것 같은 유럽의 양파도, 핸드폰 크기만큼 큰 감자도, 피망과 고추의 중간모양인 고추피망도 다 잘라서 먹기 좋은 크기로 다듬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카레를 만들 적당한 크기의 냄비를 꺼냈다. 그 냄비에 기름을 살짝 두른 뒤 사온 목살을 구웠다. 살짝 구워진 목살을 가위로 자른 뒤에 양파, 피망, 감자 순으로 넣고 가볍게 볶기 시작했다. 양파가 살짝 투명해지면 이제 적당히 물을 넣고 감자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시간이 지나 감자가 대충 익었을 때, 우리는 문제의 카레가루를 꺼냈다. 태어나 처음 써보는 찐 리얼의 카레가루 덕분에 동생과 나는 심각해졌다.


"근데 이거 얼마나 넣어야 되냐. 가늠이 안 가는데."

"그냥 일단 조금씩 넣어보고 맛을 봐보자."


한수저를 넣었다. 별로 달라진 것을 모르겠다. 두 수저를 넣었다. 여전히 별 차이가 없었다. 그냥 카레가루의 1/2을 털어 넣었다. 그제야 제법 카레다운 색이 나왔다. 카레가루를 물에 잘 풀어둔 후 살짝 맛을 보았다.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정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놀라운 맛이었다. 고기국물에 카레향이 나는 정도의 맛. 나는 이런 카레를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민정아. 이거 먹어봐. 아무 맛도 안낰ㅋㅋㅋ"


나는 동생에게 간을 보라 말한 뒤 알베르게 주방을 뒤적거렸다. 알베르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금이라도 찾아 넣을 셈이었다. 다행히 소금(Sal)을 찾아 크게 한 수저 넣었다.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다시 맛을 보았다. 여전히 내가 생각한 카레의 맛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비장의 무기이자 마지막 재료인 치킨스톡을 넣는 수밖에. 치킨스톡을 넣고 카레와 잘 섞일 수 있게 계속 잘 저어주었다. 한참을 저어준 뒤에 심각하고 비장한 얼굴로 다시 맛을 보았다.


"으음... 으음...? 으음..."


카레와 카레가 아닌 것의 사이의 맛이었다. 카레향은 제법 나는데 맛은 향에 비해 약하고 순한 맛이라고나 할까. 묘하게 향과 맛이 인지부조화가 되는 맛이었다. 이건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몇 번을 다시 맛을 봐도 많은 차이가 났다. 우리가 만든 카레는 한국에서 파는 카레가루로 만든 것과 다르게 묽었다. (한국에서 파는 카레에는 전분이 들어간다.)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치킨스톡을 넣어 완성한 카레에서 시큼한 맛이 났다.


"민정아, 치킨스톡 하나 더 넣어볼까?"

"아냐. 그냥 이대로 먹자. 더 이상 좋아질 수 없겠어."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카레를 먹기 위해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조용하고 침울한 카레한끼를 마쳤다.

앞으로는 카레가루를 무시하지 않으리... 한국산 카레가루 그것은 완벽한 재료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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