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몇 달전부터 해복이의 3안검이 눈밖으로 튀어나와서 들어가지 않았다. 안약도 써보고 먹는 약도 먹여보았지만 해복이의 체리아이는 수복되지 않았고 나는 수술로 교정을 해주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내가 안과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수술은 안과 선생님에게 부탁드려야 했다. 그래서 어제 해복이를 데리고 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수술은 다행히 잘 되었지만 수술이 예상보다 많이 길어져 기다리는 동안 속이 타들어갔다. 내가 수의사가 되어 동물을 치료할 때도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오래 걸리면 속이 타들어간다. ‘치료를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안되는 거면 어떡하지? 이쯤에서 포기해야 하나?’ 별의별 생각들이 머리 속을 떠돌며 나를 괴롭힌다. 그렇게 한 아이의 치료가 끝나고 나면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하지만 보호자로서 나의 개의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그에 못지 않게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뭔가 잘못됐나?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해복이는 괜찮은건가? 수술이 잘 되고 있는거겠지?’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들이 내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닌다. 그러다 해복이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밤 9시가 넘어 출발한 나는 눈발이 휘몰아치는 밤길 운전을 해서 오느랴 또 한번 진땀을 뺐다.
그렇게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해 맞이한 눈내리는 날은 평소보다 더 감사하게 다가온다. 나무가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낮게 들리고, 내 주면을 빙둘러 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의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창밖에는 눈이 보슬보슬 내리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누리는 일상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집안에서 바라보는 바깥풍경은 너무 아름답지만 실제로 나가보면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분다. 추위 때문에 평소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 좋아하는 복일이, 복삼이도 일찌감치 들어와 담요 하나씩 차지하고 자고 있다. 털이 덥수룩한 눈복이만 한사코 밖에 있겠다며 눈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다.
바둑이와 얼룩이는 여기 온지 6개월이 흘렀고 이제 제법 다 컸다고 예복이한테 매달려 있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복이는 새끼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고 한층 여유로와진 시간들을 편안하게 보내고 있다. 근데 얼룩이는 밖에 잘 나가서 노는데 바둑이가 도통 밖에 나가질 않는다. 아마도 어렸을 적에 크게 물린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았다. 시간이 될 때마다(데리고 나갈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고 침대 밑으로 숨는다!) 어찌어찌해서 잡히면 안고 나가서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고 안전한 곳에 내려주는데, 내려주자마자 집으로 줄행랑을 친다. 어릴 때는 나오기는 싫어해도 나오면 잘 놀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예 밖에 있지를 않으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냥 실내에서 키우면 된다지만, 바둑이가 더 넓은 데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기회를 놓치는 것만 같아서 못내 아쉬운 나는 틈만 나면 바둑이와 사투를 벌여 데리고 나가고 있다.
아이들의 말썽은 여전하다. 오히려 집에만 있으니 말썽이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이불을 물어뜯는 일은 예사이고 요즘에는 자꾸 내가 보는 책을 아작내어 놓는다. 처음에는 침대위에 나둔 책을 다 찢어놓더니 그 다음에는 책상위에 올려둔 책까지 해드셨다. 나의 유일한 취미가 책을 읽는 거고 요즘에는 도서관이 휴관 중이라 없는 돈 쪼개서 산 책들인데... 상심이 매우 크다. 다시 그 책들을 살 수가 없어서 나는 영원히 그 책들의 끝을 모른채로 끝맺어야 한다. 애들을 탓하기보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책을 책상 위에 둔게 잘못은 아닌데... 그래도 더 높은 곳에 보관해야 할 것 같다. 또 책을 사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머그컵도 내가 상당히 아끼는 물건인데 외출했다 돌아오니 박살이 나 있었다. 애들이 행여나 다쳤을까봐 부랴부랴 치우긴 했지만 치우면서도 괜히 실눈뜨고 애들을 째려보기는 했다.
꽃복이가 요즘 개춘기 시절을 보내고 있다. 괜히 지나가는 애들을 물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는 통에 내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디서 비명이 들리면 쏜살같이 뛰어가서 꽃복이를 혼을 내주기도 하는데 영 효과가 없다. 꽃복이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나의 사랑스러웠던 꽃같은 꽃복이는 어디가고 심통 사나운 아이가 내 앞에 있을 뿐이다. 엄마는 꽃복이를 묶어놓자고 하시는데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가 않아 너무 안타깝다. 꽃복이가 왜 그러는지, 단지 개춘기 시절을 보내고 있는건지, 아님 다른 불만 사항이 있는 건지, 좀 더 꼼꼼하게 살펴봐야 겠다.
장작 위에 눈이 쌓여 아침부터 장작을 방안으로 날랐다. 장작에 뭍은 눈은 건조한 내 방에 소중한 습기가 되어주고 잘 마른 장작은 온기로 방안을 훈훈하게 만들 터였다. 처마 밑에 맺힌 고드름이 햇살을 맞이해서 한방울 한방울 물방울을 떨어트린다. 완벽하게 평온한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방지축 오합지졸 나의 아이들도 오늘 나와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에 안정되어 있는 듯 하다. 물론 아침 먹고 와봤더니 두루마리 휴지(이것도 책상위에 뒀다!!)로 한 건 해놓으셨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소한 일로 나의 아이들이 싫어질리 만무하다. 다시 말끔하게 치워논 방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분들과 모든 동물들이 이처럼 따듯하고 평안한 날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