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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27. 2022

롤러코스터 같았던 결혼기념일 노트

부부가 둘 다 놀고 있는 거 맞습니다

5월 25일 결혼기념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사진을 찍었다. 매년 이 날은 이렇게 커플 사진을 찍으며 시작하기로 결혼 1주년 아침에 결정했기 때문이다. 벌써 9년이 흘렀다. 다행히 아내가 협조를 해줘서 아주 제대로 '망가진' 사진 세 장을 건졌다. 캐비초크를 한 잔씩 타서 마시고 샤워를 했다. 캐비초크는 질 좋은 야채를 분말 형태로 만든 건강보조식품인데 몇 년째 우리 부부가 아침 대용으로 장복하고 있다. 요즘 우리 동네 '미토의원(원장님이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책을 써서 이름이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를 간호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일반 진료는 안 하고 암환자만 본다고 한다)'의 암전문의 김자영 원장이 유튜브에서 언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얘기가 잠깐 딴 데로 샜다. 우리가 일찍 샤워를 한 이유는 연희동에 있는 로사 선생의 쿠킹 클래스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아내가 파스타 요리를 배우는 곳인데 결혼기념일에 나 혼자 집에서 있을 생각을 하니 눈에 밟혀 특별히 원데이 클래스로 선생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파스타 요리를 배워서 꼭 실습을 해보겠다고 했더니 아내는 신이 났다. 로사 선생은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으나 요리와 여행을 좋아해서 전 세계 요리를 섭렵한 분이라고 했다. 여행을 가서 먹은 음식이 맛있으면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이나 권위자를 찾아가 묻는 방법으로 음식의 신세계를 개척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문을 열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니 여섯 명 정도가 레시피 용지를 들고 앉아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중엔 한 동네에 사는 베제카오일 나정일 이사도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파스타와 리조또, 소고기등심 스테이크 순으로 이어졌다. 요리 강습이 끝날 때마다 와인과 함께 선생이 만든 요리를 시식했다.  로사 선생은 일사천리로 요리를 해가며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인문학적 성찰이 묻어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일명 스키장 파스타라고 부르는(선생이 몽블랑에 있는 스키장에 가서 먹은 파스타라고 한다) 숏 파스타까지 배운 뒤 수업이 끝났다. 우리는 '사러가마트'에 가서 약간의 식재료를 샀고 아내가 장을 보는 동안 나는 화장실을 이용했다.  


버스를 타고 동대문역에 있는 JW메리어트 호텔에 갔다. 레이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레이첼은 하와이에 살고 있는 아내 후배인데 9  우리가 신혼여행을 가서 신세를  적이 있다. 이번에 일이 있어서 잠깐 귀국을 했다고 한다.   『부부가   놀고 있습니다』에 레이첼 얘기가 나오는데 두산 박용만 회장이  책을 읽고 레이첼에게 전화를 해서 ", 이거 너지?"라고 물어서 웃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레이첼은 우리를 보자 반색을 하며 활짝 웃었다. 얼굴이 전보다  예뻐졌다며 아내가 반가워했다.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도저히 들어갈  없다고 해서 로비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지난 9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빈손으로  우리와 달리 레이첼 손에는 아기자기한 선물들이 들려 있었다. 무슨 얘기 끝에 남대문 수입상가 얘기가 나왔다. 레이첼이 오래전 선물로 받은 듀퐁 라이터가 고장 났는데 그걸 고치러 남대문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우리 둘이 남대문에 가서 라이터를 고쳐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레이첼이 미안해하며 수락했다. 전철을 타고 남대문 수입상가로 갔다. 듀퐁 라이터는 뚜껑을 열면 '~!'하고 나는 소리가 예술이다. 라이터는 싱거울 정도로 빨리 문제점이 해결되었다. 라이터돌이  닳았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스페어 돌까지 합쳐도 라이터 고치는 값이 8 원밖에  나왔다며 화를 냈다. 다시 전철을 타고 호텔로 가서 레이첼에게 라이터를 전해주고 대학로까지 걷다가 발이 아프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프다는 아내와 어디로 갈까 하다가 '덴뿌라'에 가기로 했다. 제일 마음이 편한 곳인 데다가 결혼기념일이니 또 한 잔 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정한 곳이었다. 아내는 덴뿌라 가기 전에 고양이 서점 '책보냥'에 가서 고양이 하로와 하동이를 약간 괴롭히고 김대영 사장에게도 시비를 걸어보자고 했다. 서점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고 김대영 사장과 양익준 감독이 있었다. 두 사람은 컴퓨터 프로그램 때문에 뭔가 고민을 하고 있어서 함께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김대영 사장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고 양익준 감독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길래 나중에 덴뿌라로 오든지 말든지 하라고 하고 우리는 덴뿌라로 갔다.

덴뿌라엔 손님이 많았다. 우리는 낙지볶음과 오뎅탕, 밥 한 공기를 시켜서 소주와 함께 먹었다. 어떤 여자 손님이 왜 이름이 덴뿌라냐고 묻자 여자 사장님이 대답해 주는 걸 듣는 과정에서 이 가게가 23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9년에 문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주 두 병을 가볍게 해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단골이었으나 아내가 채식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발을 끊은 삼겹살집 '성북로10길'을 지나다 안에 앉아 계시던 이지송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지난주에 구포국수에서 뵈었을 때 통영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이지송 감독님은 통영트리엔날레 행사에 사진과 비디오 작품을 출품했다)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 감독은 어서 들어오라고 창문 밖으로 소리를 쳤고 우리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지송 감독은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이라는 CM송으로 유명했던 우리나라 1세대 CF 감독인데 지금도 너무나 젊고 활기찬 분이다. 후배들과 함께 인사동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감독님이 성북동에도 가봐야 한다며 다 끌고 왔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오신 분들이 미술을 하거나  칼럼을 쓰는 등 문화계 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가 갑자기 그들에게 "저희 집으로 가서 차나 한 잔 하시죠."라고 말하는 바람에 졸지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 마루로 와서 앉았다. 성북동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분도 있었고 양평에 살면서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분도 있었다. 그분은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다음날 전화로 등록을 했다). 나는 '아주 웃기는 부부'라고 소개하는 이지송 감독님의 칭찬에 고무되어 우리가 한옥을 사서 고쳐 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술에 취한 김에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가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고 글쓰기와 술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호스트의 헛소리에도 전혀 비난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누가 내 전화기가 울린다고 해서 보니 양익준 감독이었다. 이제야 시간이 났다면서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자기는 카페라고 했다(양 감독은  혜화문 근처에 카페를 하기로 하고 얼마 전에 사업자 등록증까지 받은 상태다).  아내는 오라고 할 때는 안 오고 이제 전화를 하냐고 하면서 "우리가 갈 테니, 딱 거기 있으라고 해."라고 말했다.  열 시가 넘어 작별인사를 나눈 후에도 사람들은 마당에 서서 한참 집 구경을 했다. 아내는 김치를 싸들고 혜화문 근처 카페로 갔다. 양 감독은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 영업을 하게 된 양 감독의 걱정과 각오를 들었고 외로움과 술과 예술, 인생에 대해 논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재밌었지만 결혼, 여자, 외로움 등을 계속 논하기엔 너무 졸렸다. 아내에게 그만 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아내도 졸려서 그런지 고개를 끄덕였다. 양익준 감독은 혼자 조금 더 마시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서 책을 좀 읽었는데 아침에 일어난 아내는 "어젠 정말 정신없고 재미있었다."라고 말하며 껄껄껄 웃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였다.

레이첼이 찾아 준 하와이 신혼여행 때 사진. 테디베어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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